*모델 리에프×일일 스타일리스트 야쿠



 "애인이 챙겨주셔서 좋으시겠어요."
 "네, 이게 다 애인 잘 둔 덕이죠."
 "오늘도 다른 여자모델과 촬영하면 여자친구가 섭섭해 하겠는데요? 괜찮으시겠어요?"
 "아아, 부끄러운데여. 제 애인은 별로 상관 안 쓸거에여. 저는 단 한 번도 그 사람한테서 눈을 뗀적이 없거든요. 지금도."

 그러고선 지긋이 벽뒤에 몸을 숨긴 제 모습을 바라보는 리에프를 찡그리는 눈으로 그만하라고 제지하고선, 그대로 의상실로 도망치듯 들어갔다. 붉어진 볼을 붙잡고, 어쩔줄 몰라하는 모습이 꽤나 귀여웠다. 리에프는 야쿠를 보며 미소짓고선,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곧 있으면 화보 촬영이 있을 예정이었다. 아직까지도 세간에 알려진 열애설은, 일반인과 연애하는 모델 리에프였으나 사실은 달랐다. 자신의 여자친구는 남자였고, 그렇다고 야쿠가 제 스타일리스트인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항상 제 촬영장을 쫓아다니며 날 바라보는 야쿠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발갛게 달아오른 볼을 한 번쯤 꼬집어 주고싶을 정도였다. 원래라면 누나가 왔어야 할 촬영장이었으나 오늘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누님대신 야쿠상이 온 것이다. 야쿠는 오늘 일일 스타일리스트로 제 의상을 체크해 줘야할텐데. 의상실로 들어가자 주저 앉아선 벌겋게 달아오른 야쿠상이 있었다.
 야쿠에게로 다가가자 얼굴을 가리고선 가까이 오지말라는 야쿠의 말을 무시하고선, 그에게로 다가섰다. 야쿠 상을 일으켜 세우자 그는 달아오른 얼굴을 그 작은 손으로 가리고선, 제 품으로 파고드는 그가 귀여워서 한 번 안아주었더니 더 볼을 붉힌다. 암튼 귀여워, 정말.

 "야쿠상. 고개 들어봐요."
 "응."
 "여기 봐. 완전 빨게졌네. 그렇게 부끄러워요?"
 "일단 옷 골라줄게 가만히 있어봐."

 야쿠는 볼을 계속 매만지며 제 옷을 고르고 있었다. 옷을 꺼내고 건네주는 손길이 부드러웠다. 나는 그에게서 옷을 받아들고선, 옆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클래식 정장컨셉으로 웨딩컨셉 화보였는데, 굳이 보자고 하면 조금의 관능미를 더한 웨딩컨셉 화보랄까. 여기서 중요한 건, 웨딩 '컨셉' 화보였다. 절대 그 상대 모델과 하는 웨딩 화보가 아니었다. 나도 사진 감독님만 아니었다면 야쿠상이랑 진짜 웨딩사진이라도 찍었겠지. 둘이서. 하지만 이건 일이었고, 내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그저 열심히 하겠다는 말 뿐이었다. 다른 건, 생각치도 못했다.

 "나 촬영하고 올 동안, 가만히 있어여."
 "걱정마. 내가 너냐."
 "열심히 하고 올게여."

 야쿠 상을 뒤로 하고, 상대 모델과 함께 호흡을 맞추고서 촬영시간이 거의 2시간 정도가 흘러있었다. 조금 쉬어도 괜찮다는 사진감독님의 말에 의상실로 돌아가니 야쿠상이 곤히 자고 있었다. 내 애인은 어찌 저리 귀여운지, 보고만 있어도 입꼬리가 올라갈 지경이었다. 곤히 자고 있는 야쿠의 머리결을 쓰다듬자 눈을 비비며 야쿠가 일어났다. 아, 깨우려던건 아니었는데. 미안함에 야쿠상의 얼굴을 매만져 주니 좋다면서 계속 비비적 거리며 제 품으로 파고드는 야쿠상을 제 무릎에 앉혔다. 아직까지 잠이 덜깬 야쿠상이 꾸벅거린다. 나는 졸린 야쿠상의 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선 좀 더 쉬라고 이른 뒤 옷을 갈아입고 다시 촬영장으로 나갔다. 이미 야쿠가 의상을 골라놓은 뒤였기에 쉽게 입을 수 있었다. 아마 그가 없었다면 오늘도 또 매치가 안 맞는 옷을 입고나가 감독에게 안 좋은 시선을 받을 뻔했다. 하지만 오늘은 야쿠상이 있었기에 그런 일은 면했다.

 그 후 여러번의 촬영 뒤, 의상실로 들어서자 두 눈을 껌벅이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야쿠상이 보였다. 나는 그를 두 팔로 안고선, 달콤하게 속삭였다. 야쿠상도 싫지는 않았는지 고개를 흔들면서도 계속 품으로 파고들었다. 비로소 그가 팔을 벌려 제 품에 완전히 파고 들었을 때, 나는 그를 안아 올려 의상실 밖으로 나갔다. 촬영장 안에서는 이미 촬영이 다 끝났으므로 양해를 구하고 스튜디오를 잠시 쓰겠다고 이른 뒤, 야쿠상에게도 옷을 입혀주었다. 둘다 정장을 입고 있으니 진짜 웨딩화보 같기도 하고, 프로포즈하고 싶은 느낌도 들었다.

 나는 야쿠를 안아들며 말했다. 야쿠상, 좋아해요. 이런거 밖에 못해주는 나라도, 사랑해 주실래요? 감독님은 가볍게 몇 번 셔터를 누르시더니 싱긋 웃어보였다. 야쿠는 촬영 중이란 것도 인식하지 못한채로 리에프의 품에 파고들며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둘은 가볍게 버드키스를 나누었다. 둘의 달콤한 장면을 놓지지 않겠다는 감독의 열혈한 의지로 서로는 정답게 사랑을 나누었다. 둘의 밀어는 사진감독에게 들리지 않았지만, 나중에 사진을 보고 나서 놀라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던 야쿠였다. 야쿠는 리에프를 안으며 말했다. 부끄럽지만, 그래도. 난 너 많이 좋아해.

 "사랑해, 리에프."
 "저도, 저도 그래여."

 둘의 밀어는 끊임없이 이어지다가 서로의 입에 결국 먹혔으나 다시 흩어진 밀어가 서로의 귓가를 자극하기 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둘은 계속해서 사랑을 속삭였다. 마치 정말 신혼인 것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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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오해는 금물

 

 

 

 오이카와는 뺨 끝에 남은 마츠카와의 진득했던 눈길을 곱씹으며 방송국까지 걸음을 옮겼다. 붉게 물든 왼쪽 뺨 언저리에는 마츠카와의 흔적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손끝이 주는 감각에 오이카와는 약간의 온기를 느꼈으나 찬바람에 이내 그 감각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마츠카와의 시린 웃음이 눈앞을 가렸다. 처진 눈 아래로 떨어지던 그의 잔해가 바닥을 뒤덮고선, 오이카와는 그 잔해 위에서 유영하던 한 마리 물고기였다. 펄떡이던 그의 숨소리를 들은 적이 있던가. 마치 심해 생물처럼 깊은 바닷속을 누비며 느릿하게 바닥을 훑고 지나가고, 제 살결에 닿은 그의 손길은 점차 옅어져갔다. 심해의 묵직한 것에 눈길이 팔려있을 때 즈음, 연하게 쓸어내리는 그의 목소리가 탁하게 귓가를 울렸다.

 -내일 봅시다.

 그 말에, 단 한마디에 그렇게 녹아내렸던 것이다. 오이카와는 여전히 차갑게 얼어붙은 볼을 매만지며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차가운 바람이 걷히고, 눅눅한 공기가 주위를 감싸자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눅진하게 얼어붙은 그 곳의 공기가 싫은 탓이었다.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이었으나 비온 후의 습한 공기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단지 맑은 날을 더 좋아했을 뿐일지도 모르겠다. 오이카와는 잡생각을 떨쳐버리고서 차의 시동을 걸고 추위를 녹였다. 차 안의 히터가 돌아가는 소리에 귓가가 웅웅 울렸으나 금세 그의 잔해가 다시 귓가에 가득 찼다. 오이카와는 애써 그 이질적인 감정을 마음속에 담으며 그를 지우려 노력했다.

 집에 도착하자 저를 맞이하는 건 차갑게 식은 냉기 어린 방이 아니었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얼굴을 보자마자 달려와서 손부터 들이 밀었다. 착잡하게 손에 들린 비닐봉지를 건네주고서야 자신의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를 죽 훑으며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분명 자신의 권유로 현관 문 비밀번호를 알려줬었고,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가 선수생활로 집을 비울 때마다 항상 오피스텔에 와서 생활했었으나 이렇게 갑작스럽게 방문했을 거라곤 생각을 못했었다. 오이카와는 머리를 긁적이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따뜻한 온기가 불어 들어왔다. 이와이즈미는 술상을 거하게 차려놓고선 오이카와를 기다리고 있었다. 첫 번째는 가볍게 맥주로.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를 앉히고선 냉장고에 캔 맥주를 가지러 갔다. 오이카와는 코트를 벗으며 앉았는데, 찝찝함에 샤워를 하러 가자니 이와이즈미의 호통이 두려웠다. 그는 이미 냉장고에 남아 있던 술 한 병을 다 마신 뒤였고, 조금 취해있었으나 아마 제가 방으로 들어가겠다고 한다면 불같이 화낼 터였다. 두려움에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오이카와는 다소곳이 앉아 이와이즈미를 기다렸다. 그가 준비해놓은 맥주잔을 받아들었다. 거하게 들이 붓는 대담한 그의 손길이 이토록 원망스러울 수가 있었던가. 내일 일하러 가야하는데. 거부하기엔 이와이즈미의 주정이 너무나 두려웠기에 그냥 마시기로 했다. 시원스레 넘어가는 샛노란 액체가 목 끝을 적셨다. 오이카와는 반 쯤 정신을 놓았고 , 그 후로 이와이즈미가 건네는 술을 곧이곧대로 받아마셨다. 뻗은 게 누가 먼저라고 말할 수 없었으나 확실한 건, 이와이즈미의 필름이 끊겼을 때 자신은 아직 소주잔을 홀짝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마지막 남은 잔을 깔끔하게 비우고서야 골아 떨어졌었는데, 한 2시간 정도 후에 이와이즈미가 다시 깨어나선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혼탁한 시야를 그에게 맞추고선 그를 바라보니 그는 멀쩡한 얼굴로 술을 한 병 들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눈을 찌푸리곤 흐릿한 눈길을 그의 얼굴에서 병으로 떨어뜨렸다. 그 존재를 보자마자 놀란 오이카와는 이미 신경에 먹힌 몸을 억지로 세우며 그에게로 다가가려 했으나 이미 그는 술병을 따놓은 뒤였다.

 '천사의 유혹'. 구하기 힘들어서 엄청 독한 마음을 먹고 산 거였는데. 육두문자가 입 밖으로 튀어 나갔을 지도 모르겠다. 이와이즈미는 가볍게 웃으며 다시 술잔에 '천사의 유혹'을 따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구한 건데 저게. 그 개 같은 선배님을 통해서 얻은 거란 말이야. 이제 구할 곳도 없는데, 어쩌지. 작은 술잔에 깔끔하게 채워진 그것을 보고 있자니 오이카와는 현기증이 밀려들어왔다. 마음 같아서는 친구고 뭐고 쫓아내고 싶었지만 그렇게 했다간 오히려 자신이 쫓겨날 수도 있었다. 만취한 이와이즈미 하지메는, 만취한 오이카와 토오루보다 힘이 세니까. 오이카와는 굳게 쥔 손을 풀었다. 체념한 상태로 다시 받아드니 그는 쉴 새 없이 제 잔으로 쏟아 내고 있었다. 쓰디 쓴 술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40도에 달하는 독한 술이라 조금 씩 먹으려고 했는데 이미 후회는 지나간 뒤였다. 천사의 달콤한 유혹이 귓가를 파고드는 것 같았다. 그건 마치 지옥의 불구덩이 속에서 나를 부르는 마츠카와의 목소리와도 닮아있었다.

 이와이즈미는 천사의 유혹을 다 마시고선, 빈 병을 짤랑대며 다른 술을 찾았다. 나는 고개를 양옆으로 흔들며 격렬하게 반대했으나 이번에도 이와이즈미의 손이 빨랐다.

 "그거, 그러니까 그건."

 "이게 뭐야아? '백년의 고독'? 이런 건 또 어디서 구했대? 나 먹어도 되냐?"

 "아, 그거 구하기 어려운데…."

 "쿠소카와. 이런 건 좀 나눠먹고 하는 거야. 응?"

 애석하게도, 이와이즈미는 애교 섞인 말투로 투정하고 있었다. 그것은 저만 알고 있는 주사였는데, 그는 처음엔 묵묵히 잘 마시다가 어느 정도가 넘어가면 기절하더니 한 두어 시간 뒤에 다시 일어나서 술을 다시 퍼마시는 것이었다. 일어나서 마시는 주량은 그 전보다 작았으나 도수가 문제였다. 그래서 매번 제 양주가 없어지는 탓도 저 놈 짓이었고, 그 끝에서 눈물짓는 건 오이카와였다. 사실 오이카와는 선수 기간 동안 술은 거의 마시지 못했고, 경기 끝나고 맥주나 홀짝이는 정도였다. 반면에 이와이즈미는 제가 힘들게 구해놓은 비싼 양주들을 뺏어 먹고선 미안하다고 물렀다. 그것도 늘, 항상.

 저 놈은 왜 술에 그렇게 취했는데도 발음도 무너지지 않는 건지 오이카와는 내심 궁금해졌다. 이와이즈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빠르게 줄어드는 술병을 보며, 이미 체념한 채로 그냥 들이켰다. 타들어가는 술의 여운이 짙게 물들었다. 깊게 쏟아지는 잠도 눈 주변에 머물렀다. 저런 독한 술을 다 마시겠다고 계속 따르는 이와이즈미도 대단했으나, 그걸 또 받아먹는 오이카와는 자신이 꽤나 한심하다고 자책하며 고꾸라졌다.

 난방은 또 왜 이렇게 세게 틀었는지 오이카와는 슬슬 올라오는 취기에 자면서 옷을 벗어던졌다. 실은 의식이 없었던 터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이와이즈미도 덩달아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 난방을 끌 생각도 하지 않은 채로, 뜨거운 술기운을 들이키며 깔아놓은 이불 위로 몸을 눕혔다. 이와이즈미도 남아있던 술을 다 마셨는지 제 옆으로 기어들어왔다. 그렇게 어영부영 정리하지도 않은 채 그들은 기나긴 잠에 취했다.

 다음 날 먼저 일어난 건, 이와이즈미였다. 아침부터 시끄럽게 울려대는 초인종 소리에,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현관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정장차림의 키 큰 남성이 이와이즈미의 앞에서 의아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주위를 번갈아 봤고, 손에 들려있는 쪽지도 훑었으나 무슨 일인지 판단이 서지 않는 것 같았다.

 "여기, 오이카와 토오루 씨네 집이 아닙니까?"

 "맞습니다만. 누구십니까?"

 "아, 저는 마츠카와 잇세이라고 합니다. 오이카와의 직장 동료죠."

 정확히는 오늘부터. 덧붙이려던 말을 생략하니 한껏 어색해진 분위기를 차마 이끌어가기가 힘들었다. 그나저나 이 사람은 누구지. 오이카와 씨랑 동거하는 사람인가. 오이카와, 그렇게 안 봤는데 남자관계가 꽤 문란하네, 와 같은 생각을 머릿속으로 덧붙이고 있던 도중에 현관문 밖으로 튀어나온 그 남자의 손이 마츠카와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마츠카와는 잠시 당황해서 멱살 잡은 손을 제지하며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제 생각을 읽힌 기분이었다. 아님 무의식에 입 밖으로 내뱉어버린 탓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누구라도 의심하지 않겠는가. 남자는 트렁크 한 장만 걸친 채로 추위에 오들오들 떨며 텁텁한 보일러의 공기가 터져 나오는 방안에서 붉게 물든 얼굴로 제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고, 살짝 열린 문틈사이로 보이는, 오이카와로 추정되는 발과, 널브러진 이불은 오해사기 딱 좋은 구도였다. 그는 눈을 부라리며 마츠카와에게 쏘아붙였다.

 "네가 그 망할 선배 새끼냐? 오이카와가 끔뻑 죽어 못산다던 그 개새끼? 시발, 오늘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난 선수도 아니니까 선배고 뭐고, 이 지랄 할 것도 없거든? 그러니까 입 꽉 물어라. 턱 빠질, 커억."

 이와이즈미의 소란에 오이카와는 흐릿한 눈길을 현관으로 향했다. 문 사이로 보이는 검은 정장이 어딘가 익숙했다. 그 위로 보이는 입술도, 코도, 눈도 전부 익숙했다. 맙소사. 그 사람이었다. 시계를 바라보자 나가기로 약속했던 시간은 넘어간 후였고, 거의 점심때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찾으러 온 거였나. 오이카와는 재빨리 현관으로 나가서 그의 멱살을 붙잡고 있는 이와이즈미를 제지했다.

 "그만해, 이와쨩. 개선배 아니니까 그 사람한테서 손 떼."

 그런데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조금 미묘했다. 아마도 그것은 어제 무의식적으로 벗어낸 옷가지들이 현관 뒤에 널브러져 있고, 오이카와의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쳐지지 않은 탓일 테다. 차가운 바람이 현관에서 방 안으로 퍼져들어왔다. 서늘한 공기가 살결에 닿자, 그의 시선 곳곳이 제 몸으로 향했다. 그것은 수치스럽다기보다 어쩐지 미묘한 시선에 가까워서, 대놓고 가리기에도 뻘쭘한 상황이었다. 여자애도 아니고, 같은 남자끼리 가리긴 왜 가려. 이런 느낌? 하지만 현관 앞에서 외간남자에게 알몸을 보이기에는 조금 수치스러운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는 소꿉친구인 이와이즈미와 달랐을 뿐더러 겨우 어제 만난 사람이었다. 목욕탕에서 서로의 몸을 끈적하게 바라볼 수도 있는, 단 한번 만날 뿐인 남남이 아니라 오늘부터 직장상사가 될 사람. 오이카와는 잠시 생각하더니 급히 방으로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그의 볼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이와쨩, 나 갔다 올게."

 "어, 그래. 갔다 와서 얘기하자."

 가볍게 인사를 마치고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지며 현관을 나섰다. 마츠카와는 그런 오이카와의 모습을 빤히 쳐다보더니 궁금한 질문들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여긴 누구집인지, 저 사람은 누군지, 밤에 뭘했길래 상태가 이런 건지 등을. 오이카와는 쏟아지는 질문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애써 온전한 정신을 붙잡으며 그의 질문에 응했다.

 "그러니까, 제 집인데요, 쟤는 친구고 오늘 쉬는 날이라 잠시 놀러온 것뿐인데. 아, 밤에는 술 밖에 안 마셨어요!"

 "술은 왜?"

 왜냐니. 저 새끼가 소주 광이라서 그렇지. 사실 다른 놈들 중엔 이와이즈미를 상대할 자식이 없어서 그런 것이었다. 오이카와는 말하기 어려운 질문에 머리만 긁적이며 살짝 미묘한 웃음을 흘겼다.

 "너무 많이 마시지는 마. 모델 되려면 그렇게 마시면 안 돼."

 "아, 네."

 "다음엔 내가 살 테니까, 친구는 떼놓고 와. 알겠지?"

 그럴 필요는 없는데. 자연스럽게 놓은 말도 인지하지 못한 채 오이카와는 고민했다. 그는 아직까지 자신의 주사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이와이즈미에게 물었을 때, 애교부리는 게 주사라고 듣긴 들었는데, 아직까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던 걸 보면 혹여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래도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오이카와는 대충 알겠다고 끄덕이며 그의 차를 타고 가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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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모델 해 볼 생각 없습니까?

 

 

 

 맞잡은 두 손에서 마츠카와는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세심한 감촉을 느꼈다. 오이카와의 손가락에는 훈련으로 단련된 굳은살이 자리 잡고 있었고, 곳곳으로 느껴지는 영광의 상처들이 손에 표식을 새겼다. 헌데도 유난히 눈에 띄는 건, 오이카와의 오른손에 여실히 드러난 흉터 자국이었다.

 마츠카와의 눈썹이 움찔거렸고, 곧이어 몰아 내쉬는 그의 숨소리에 오이카와는 약간 당황했지만 황급히 달려 나가는 마츠카와의 손에 이끌려 그 또한 주차장으로 뛰어갈 수밖에 없었다.

 눅눅한 공기를 머금은 지하 주차장의 불빛이 걸음마다 따라 나섰다. 차 앞에 다다르자 마지막으로 빛을 밝힌 구석의 한 자리에는 깔끔하게 반짝거리는 고급 세단 한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마츠카와의 손에 들린 차 키에서 고요한 울림이 퍼졌고, 이내 차 문은 열렸다. 차가운 냉기가 보이지 않는 주변을 에워쌌다. 마츠카와는 오이카와를 보조석에 태우고선, 자신도 운전석에 올라탔다. 끈적하게 달라붙던 손길의 여운이 아직까지도 손끝에 남아있던 까닭에, 핸들을 잡고서도 아직까지 심장이 뛰는 이유리라. 마츠카와는 시동을 걸었고, 때 마침 제 손에 들려있던 휴대폰에서 발신자의 전화번호가 나타났다. '지이(じい)'였다.

 여기에 대해 잠시 변명해보자면, 터무니없는 생각이었으나 지을 당시에는 굉장히 놀랍고 획기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마츠카와는 묻지도 않은 변명거리를 생각해냈다. 장난삼아 케이지, 케이지 하고 그를 이름으로 부르게 된 게 어엿 2년 째, 그리고 그런 그를 보고 있자면 무엇보다 절실하게 드는 생각이 '통화상대 명'을 바꿔야겠다는 것이었다. 마츠카와는 케이지를 읊조리다 끝 부분에서 영감을 얻어 '지이(영감)'가 되었다고 무색한 변명을 머릿속으로 되뇌어 보았다. 물론 그런 별명이 자리 잡기까진, 애늙은이라는 표현이 대신하고 있었다. 지이, 지이. 케이지. 마츠카와는 딱 세 번 마음속으로 아카아시의 이름을 외쳤다.

 열렬하게 울리는 휴대폰에 시선을 한 번 주고, 오이카와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무언의 표시와 함께 차에서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전화를 받았다.

 [마츠카와 상?]

 [아아, 미안해. 일이 좀 생겼거든. 오디션 잘 보고, 나중에 가게에서 봐.]

 [예,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행운을 빌어, 케이지.]

 귓가로 파고든 낮은 울림의 여운이 정적에 감싸였다. 다행히도 오이카와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차 안에 조용히 앉아있었다. 그는 간간히 뒤쪽 창문을 응시하며 마츠카와가 오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그가 도착했을 땐, 축축해진 옷깃을 붙잡고 오들오들 떨며 불편하게 앉아있는 오이카와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운전석에서 본 그의 몰골은 더더욱 비참했으나 그는 딱히 신경 쓰지 않을 듯 했다. 오히려 이 어색한 상황에 익숙해지지 못해 방황하는 것 같았다. 그의 모습이 욱신거리는 제 신경을 자극했다. 놀랍게도, 그것은 편파적인 반응이었으나 꽤나 타협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츠카와는 떨고 있는 그의 손을 마주잡고선 나지막하게 말했다.

 "많이 추우십니까."

 "아니 …, 괜찮습니다. 손 떠는 건 습관같은거라."

 그 후로 둘의 침묵만이 적적한 공기를 갈랐다. 갇혀있는 텁텁한 공기에 흐릿해진 정신을 부여잡고선 주차장에서 빠져나왔다. 방송국에서 가게까진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도착했다.

 가게는 꽤나 아담한 편이었다. 옅게 흩어지는 종소리를 들으며 오이카와는 어두컴컴했던 가게의 불이 켜지자마자 감탄을 자아낼 수밖에 없었다. 정갈하게 정돈된 가게의 깔끔함도 한 몫 했거니와, 그것보다도 분위기의 문제였다. 솔직히 말해, 맞춤정장이라고 들었을 때 이런 분위기를 상상했던 건 아니다. 고상하면서도 우아한 디자인이 벽지에 녹아있었고, 소품 하나하나에도 다 신경을 써 놓은 듯 한 느낌이었다. 오이카와는 그 아름다움 속에서 왠지 모를 이질감을 느꼈다. 저런 남자에게 이런 취향이 있었다니-정도의 이질감을. 실은 우아하고 고상한 디자인이기도 했으나 살짝은 여성스런 아기자기한 분위기여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오이카와가 잠시 말을 끊자 마츠카와는 의아하다는 듯 오이카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깨닫고는 오이카와에게 말을 걸었다.

 "왜 이런 분위긴지 알고 싶으신 겁니까?"

 "그걸 어떻게…."

 "그야 매번 찾아오시는 분들이 물어보시니까."

 "아…, 네."

 "실은 가게를 열기 전에, 이 가게 전체가 아틀리에였습니다. 그 때, 여성복을 만들던 친구가 있었는데, 일이 있어서 이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멍하니 가게를 바라보고 있던 오이카와의 앞을 스쳐지나가며 조심스런 시선을 보냈다.

 "제 아틀리에는 저깁니다."

 조심스레 내뱉은 말과 손이 오이카와를 안내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서 쪽문을 열고 내려가니 반지하로 된 아틀리에가 있었다. 그곳도 가게 못지않게 화려했다. 오이카와는 눈으로 주위를 훑으며 앞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마츠카와는 치수를 재기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고, 오이카와는 잠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곧이어 마츠카와는 그를 불렀고, 그는 조용히 마츠카와에게로 다가갔다.

 "오이카와 상, 잠시 이쪽으로."

 오이카와는 정장 자켓을 벗고 마츠카와가 지시하는 대로 몸을 세우자 그는 조심스레 오이카와의 치수를 재기 시작했다. 딱딱하게 긴장한 오이카와의 근육이 얇은 셔츠사이로 살짝 드러나자, 마츠카와는 치수를 재면서도 그 쪽으로 신경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혼자 감탄하며 오이카와의 근육을 쓸어내리고선, 입맛을 다시며 혼잣말을 이어갔다.

 "역시 운동선수라 그런지 비율이 좋네. 근육도 잘 짜여져 있고. 특히 이 부근이."

 "아…, 마츠카와 상!"

 오이카와의 들뜬 한숨에 마츠카와는 놀란 듯 바라보았으나 붉게 상기된 볼 말고는 별 문제가 없어보였다. 마츠카와는 오이카와의 손을 계속 붙잡고 있었다. 치수를 재겠다는 핑계를 두고, 팔의 길이를 재는 동안에도 한 쪽 손과 줄자의 끝부분은 오이카와의 손에 닿아있었다.

 "불편하면 말 놓아도 됩니다. 맛층이라고 불러도 좋고."

 "그게 아니고…!"

 "그럼?"

 "그, 거기, 손 좀 놓아주셨으면 하는데."

 오이카와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뒷걸음질 치자 마츠카와는 변명거리를 떠올려냈다.

 "아…, 아니, 세터라서 그런지 손이 예쁘길래 나도 모르게 그만."

 "…조금 춥네요."

 오이카와는 납득한 표정이었다. 머리를 긁적이며 부끄러워하는 그를 보며 마츠카와는 옅은 웃음을 지었다.

 "겨울이니까요. 감기 들겠다. 아, 그리고 기장은 다 쟀으니까, 다 만들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젖은 옷은 제가 세탁해 드릴 테니 일단 이거라고 입고 계세요."

 그가 내민 건, 청바지와 정장 셔츠, 니트였다. 오이카와는 아틀리에에 딸린 작은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었고, 세탁물은 마츠카와에게 건넸다. 그의 옷인지 좀 큰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적당히 맞았다. 추위에 감기 걸려 죽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막상 그의 옷을 입었다고 생각하니 부끄럽다기 보단, 조금 안일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그냥 세탁비만 받아서 와도 괜찮았을 법 한데 할 일도 없는 나머지 그냥 따라와 버린 제 자신이 조금 부끄러워졌다.

 마츠카와는 오이카와의 치수를 빠짐없이 기록하고, 다시 돌아와선 넌지시 그에게 물었다.

 "저, 혹시 모델 해 볼 생각 없습니까?"

 "모델이요?"

 "네. 피팅모델."

 "저, 내일부턴 일자리를 찾아봐야 해서, 그건 안…."

 "월급도 드릴 테니까."

 잠시 월급이란 소리에 혹 빠진 오이카와는 고민에 빠졌다. 옷까지 만들어 주신다는데, 좋은 기분으로 흔쾌히 수락했다. 마츠카와는 꽤나 기뻐했다. 오이카와에게 집 주소를 물은 뒤, 서로의 전화번호를 주고받았다. 가게 문 앞에서 둘은 조용히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럼 내일부터 바로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네. 내일 봬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10시까지 오시면 될 것 같습니다만."

 "맞춰서 오겠습니다."

 마츠카와는 오이카와를 보내고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가게로 들어갔다. 곧이어 딸랑거리는 종소리가 다시 귓가를 파고들었다. 오이카와가 다시 돌아온 건가 싶어 뒤를 돌아보았으나 애석하게도 그는 오이카와가 아니었다. 아카아시는 웃으며 들고 있던 대본을 흔들어 보였다. 마츠카와는 대수롭지 않게 그의 손에서 대본을 뺏어갔다. 펄럭거리는 소리가 둘의 공기를 갈랐다. 아카아시의 손이 아래로 떨어지고, 마츠카와는 그 큰 손으로 아카아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했다는, 격려의 의미로.

 아카아시는 오이카와가 붙지 못했던 오디션에 단번에 붙었으며, 주연 자리를 꿰찼다. 하지만 마츠카와로부터 충격적-이라기 보단 난감스러운- 소식을 전해 받으리라곤 상상하지 못했었다. 마츠카와는 아카아시에게 이제 피팅모델은 그만 해도 되겠다는 통보를 했다. 아카아시는 아쉬워하면서도 알겠다고 말했다.

 둘은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차를 마시며 잠시 가게에 있다가 밖으로 나갔다. 마츠카와는 가게의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카아시를 배웅했다. 마츠카와는 세탁할 오이카와의 정장과 아카아시의 정장을 챙겨들고 집으로 향했다. 아쉬운 마음에 돌아가는 마츠카와의 모습을 계속 뒤돌아보면서도 아카아시는 재빠르게 거리를 벗어났다. 조금, 추운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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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구원하소서. 그대가 나를 구원한다면야 어떠한 것도 바라지 않을테요, 다만 그대를 원할 뿐이니.
 산산히 부서지는 갈망 속에 타들어가던 애절함은 사그라들고 있었다. 비는 추적추적 내리었고, 눈물 방울은 끝무렵에 걸쳐있었으며 서로의 손은 맞잡은 채로 무참히 찢겼다. 그의 뜨겁던 몸뚱아리와, 귓 속에서 흩어져버리던 약한 숨소리마저 사라져버린지 오래였다. 나는 당신을 잊지 않겠노라고. 그렇게 다짐했던 때가 무색하게 나는 기억 속에서 완전하던 당신을 조각내고선, 애써 조각난 기억의 산물을 전부 무의식의 심해로 던져버렸다. 다신 그 기억을 꺼낼 이유도, 그럴 일도 없으리라.

 그 날 그렇게 다짐하고선, 다시 그가 생각났다. 그는 나의 구원자이고, 내 인생에서 전환점에 서 있던, 그 구원은 절대 잊혀지지 않을 것이며, 바라건대 나는 그를 다시 만날 수 있길 빌었다.

 이와이즈미 하지메는 3년 전, 자살기도를 하던 나를 구해주었다. 이젠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 조차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무턱대고 비오는 거리를 걸었던 것 같다. 그렇게 계속 걸었다. 걷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리는 여전히 어둑하게 깔린 어둠에 앞은 보이지 않았으며, 껌벅거리는 가로등 불도 곧 꺼질 것만 같았다.

 빗 속을 뚫고 지나쳤다. 차들은 한산한 도로를 달리고 있었고, 어둑한 골목으로 접어들었을 때엔, 저 멀리 보이는 가로등 한 개 외엔 전부 벽으로 둘러쌓여 있었다. 나는 그 밝은 가로등 불을 흐릿한 눈길로 응시했다. 추위에 나뒹구는 시체가 있다면 시청에서 처리해줄까. 유서라도 써놓는게 좋을까, 와 같은 의미없는 물음이 계속해서 귓가를 맴돌았다. 나는 그 날 죽음을 각오했다.

 실은 죽더라도 밝은 곳에서 죽길 원했다. 앞으로 계속 사람이 지나치지 않을 것만 같은 골목이었다. 그 흔한 고양이 조차도 없는 걸 보면 사람도 지나치지 않을 터였다. 비가 와서 없는 걸지도 모르겠다. 한 명 정도는 지나면서 죽어있는 내 시체를 발견하고선 누군가가 처리할 게다. 그저 죽음은 예견된 미래였다.
 그 때, 누군가가 제게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거기 앉아 있으면 감기 걸리실텐데."

 그 남자였다. 짧은 머리가 인상적이었던, 눈매마저도 아름답던 그가 제게 말을 건네왔다. 그는 나를 일으켜 세우고선 내 손을 맞잡았다. 이미 내려간 체온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떨어져 있었다. 그는 나를 부축하고선, 근처 경찰서로 데리고 갔다.
 나는 별 수 없이 경찰서에 갇혀있어야 했다. 이제 갈 곳이 없었다. 그가 내 보호자라는 말을 하고서는 경찰서를 나섰고, 나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그를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조금 있다가 돌아온다는 그 남자의 말이 귓가에서 헛돌았다. 뺨 끝 언저리에 남은 그의 온기는 다시 차갑게 변질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남자는 오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죽지 않았으나 나는 경찰에게 내 신원에 대한 진술을 해야했다. 몇일 전 일어난 주택 살인사건의 피해자이며, 나를 제외한 가족 전부가 죽었다는 사실을 눈물을 머금은 채 대답했다. 나는 구원받지 못할텐가? 나 홀로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너무나 괴로웠다. 차라리 죽었더라면. 아니, 그가 나를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사체가 되어 그냥 거리의 쓰레기로 전락되어 땅 어딘가에 묻혀졌을지도 모르겠다. 끔찍한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그 남자를 다시 만나지 못하고 혼자서 다시 시작해야했다. 그렇게 3년이 지났다. 나는 아직까지 그 남자를 만난 적이 없다. 이제야 내가 살아갈 이유가 생긴 것 같았다. 그 남자를 다시 만나는 것. 그것이 내가 살아있는 이유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대가 나를 구원한다면야 어떠한 것도 바라지 않을테요, 다만 그대를 원할 뿐이니.





 


 

1

첫 만남은 우연

 

 

 필연은 아닐지언정, 그건 우연에 가까웠다.

 그 날은, 그의 은퇴기사가 공공연하게 떠다니던 날이었다. TV를 쳐다보던 그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탁상위에 있던 리모컨을 들어 채널을 옮겼으나, 불행하게도 온통 자신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다시 선수생활을 재개하지 않을까, 와 같은 여론이 몰려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의 손은 회복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오이카와는 움직거리던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뚜둑거리던 뼛소리와 손의 감촉이 선명하게 제 기억을 덮친다. 그리고 뒤이어 차가운 감촉이 제 손을 어루만졌다. 오이카와는 생각했다. 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런 수모를 겪어야 하냐며, 천장에서 밝게 새어나오는 빛 때문에 검은 그림자로 보일 뿐인 지극히 평범한 남성에게 따지듯이 입을 열었으나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정신은 점점 무뎌졌으나 신경은 무뎌지지 않고 선명했다. 살갗을 파고들어오던 쇳덩이의 감촉이 신경을 자극하고, 거의 산산 조각난 뼛조각에는 마취약이 들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몸은 고통에 울부짖으며 수술이 끝나기만을 간절히 기다릴 뿐이었다.

 마취의 효과가 떨어지자마자 극심한 통증이 밀려들어왔다. 성급하게 끊어진 신경을 이어 붙인 듯 뼈 마디마디에 통증을 느꼈다. 오이카와는 깨어나지 않으려 했으나, 시끄러운 소음이 귓가를 파고들어 몽롱한 정신을 깨웠다. 하지만 그를 깨우려는 건 비단 그것뿐만이 아니었으리라. 마취에 풀려 허공에 대고 허우적거리던 그의 손을 잡은 건 감독님이셨다. 그는 아직 마취가 덜 풀렸는지 눈은 반쯤 감은채로, 죽은 사람이 이승에 내놓은 영혼을 찾듯이 필사적으로 손을 잡았다. 그러나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순간 오이카와는 몽롱한 상태였으나 자신의 몸이 뜻대로 할 수 없어졌음을 깨닫고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허공을 휘젓던 손과, 감독님의 억센 손아귀에 팔목이 잡혔을 때조차도 반항하던 그가 현실을 받아들이고 손에 힘을 풀었다. 살짝 뜬 눈 위로 수술실의 전등이 어른거리고, 그 위로 감독님의 얼굴이 덧대어졌다. 병원 특유의 시큼한 향기가 코를 간질였다. 정신마저도 잠식된, 기나긴 잠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그는 비로소 다시 태어난 것에 대해 감사했다. 하마터면 그대로 죽을 뻔 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테다. 아무래도 뒤 끝이 찝찝하더라니. 그는 움직이지 못하는 손을 애써 감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야에 들어온 건, 도쿄 대학 병원의 마크가 새겨진 병원 이불과 입원실 내에 비치된 작은 냉장고, TV정도뿐이었다. 창문은 열려있었다. 1인실이어서 딱히 시끄럽지는 않았으나, 열린 창문 사이로 바람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아마 감독님께서 열어 놓으셨을 테다. 이 추운 겨울에, 대체 왜. 환기를 위해서? 아니. 바깥의 공기를 맡고, 어서 일어나라고. 무의식중에 그런 목소리가 들렸다. 병원 공기만 맡다간 그대로 갈지도 모르겠다고. 먼저 가 버릴까봐, 불편하다고. 정작 감독님께선 불편하게 간의 침대에서 숙면을 취하고 계셨다.

 아직 밤이었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다시 쏟아지는 졸음에 몸을 눕히고 눈을 감았다. 주변은 금방 어두워졌다. 정신은 또 다시 잠식되었다.

 "……야, 오이카와. 오이카와 토오루!"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누군가의 부름은 다시 귓가를 간질였다.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자 신경이 곤두섰다. 상대는 오이카와를 깨우려고 그의 손을 잡았다. 익숙하지 않은 감촉에 팔이 경련했다. 오이카와가 애써 눈을 뜨자 시야에 들어온 건, 손을 잡고 있는 선배의 뻔뻔한 낯짝이었다. 순간 그 간의 서러움이 치솟았으며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랐으나, 손이 저 상태라 몸을 움직일 수 없는 탓에 가만히 누워 화를 삭일 수밖에 없었다. 오이카와는 팔꿈치로 간신히 자신의 몸을 지탱해 일어섰다. 침대에 있는 기계로 올라오고 싶었으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버튼을 누를 수가 없었다. 애달프게 시선을 외면하고 있는 선배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는 까닭이었다. 속으로는 이를 빠득빠득 갈면서도 얼굴에는 애써 미소를 지어보였다. 선배는 미안하다는 한마디를 무심하게 내뱉고선, 창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이카와는 힘을 주지도 못하는 손에 살며시 주먹을 쥐었다. 다시 뼈마디에 통증이 느껴졌다. 선배는 아마 이 미묘한 움직임을 눈치 채지 못했으리라. 평소에도 무관심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인지 단번에 움직임을 알아차리고선, 창가로 돌리고 있던 시선을 다시 마주했다. 여전히 그의 눈은, 냉동 창고에 처박힌 동태눈처럼 흐릿했다.

 "사고였습니다. 그러니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선배님도 코트에 나가고 싶어 했지 않습니까?"

 "……."

 "아, 당신의 그 짓을 받아줄 사람이 없어서 그런 겁니까?"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분명 아픈 환자에게 손을 올리긴 했지만 차마 때릴 순 없었을 것이다. 아마 마음속으로 이놈을 때릴지 말지에 대한 내적갈등을 겪었을지도 모르겠다. 오이카와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을 들어올렸다. 보기에도 앙상하게 마른 손가락을 조심히 접었다. 말려 들어가는 마디가 퍽석하게 부서지는 느낌이었다.

 "이 손은, 10년간 코트 위에서 썩혀왔습니다. 애초에 이 손은 배구 밖에 모르는 손이었단 말입니다. 당신이 가르쳐 준 그 짓 빼곤, 이제 아무 것도 할 수 없단 말이죠. 아아, 당신이 생각하는 그 짓도 못하겠네요. 아쉽겠네. 근데 그건 압니까? 이거 다 당신이 자초한 일이야."

 "내가 그랬다는 증거 있어?"

 "선배가 직접 하지는 않으셨죠. 하지만 당신 때문에 선수 생활도 끝이란 말입니다."

 "치료 끝나고 다시 돌아오면…."

 "시합이 애들 장난입니까? 공백이란 것도 무시할 수 없단 말입니다."

 솔직히 조금은 기대했다. 다시 배구 선수로 복귀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가 어렸다. 그래서 치료가 끝나면, 주전 세터로 팀을 이끌어 나갈 선배에게서 다시 주전 자리를 받아오고, 반드시 밟아 주리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오이카와 씨. 당분간은 손을 쓰지 않도록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애써 뼈를 붙여놨는데, 다시 수술하고 싶지 않으시다면 가만히 놔두십시오. 그리고,"

 "그리고?"

 "선수 생활은 은퇴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손 상태가 매우 안 좋습니다. 거기서 연습으로 손을 혹사시키면 수술은커녕 손을 못 쓰게 될 수도 있으니까."

 청천벽력인 소리였다. 다신 손을 쓸 수 없을 수도 있다고 했다. 깐깐하게 생긴 의사는 회진하던 도중이었으므로 다른 환자를 진료하러 나갔고, 오이카와의 손을 붙잡고 있던 여 간호사들도 재빨리 따라 나갔다. 남은 건, 감독님과 선배뿐이었다. 오이카와는 자신의 손을 매만지던 여 간호사들의 감촉을 곱씹었다. 그러다가 선배와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반반한 낯짝이었으나 흐릿한 눈빛사이에 비친 제 모습과 견줄 만큼은 아니었다. 오이카와는 다시 얼굴에 미소를 띠며 감독님을 불렀다.

 "감독님. 아무래도 이 손으로 시합에 나가긴 힘들 것 같으니까, 은퇴하겠습니다."

 "오이카와."

 "죄송합니다, 감독님."

 감독님께선 아무 말 없이 오이카와의 손을 쓰다듬었다.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으나, 마음속에서 끓어오른 아쉬움은 여전히 들끓고 있었다. 이게 전부 다 그 사람 때문인데, 앞에 있는데도 화낼 수 없는 이 상황이 빨리 지나가길 빌었다. 그런 희망은 무색하게도 깨어진지 오래지만.

 선배는 다시 그 뻔뻔한 얼굴로 돌아와선 본성을 숨겼다. 어디까지나 착한 선배이자 후배 세터에게 주전 자리를 빼앗긴 불쌍한 사람으로 살았으니까. 하지만 연기는 거기서 그쳐야 했다. 굳이 그 작은 자존심 하나 지키겠다고 후배에게 역겨운 짓을 시키는 건, 짐승만도 못한 짓이었다. 정작 제 손을 그렇게 만들어 놓은 건, 당신이면서. 이제 와서 괜찮냐는 애정 어린 관심을 보여주는 이유는 무엇인가. 다 지나간 일을 가지고 이렇게 되새기는 것도 이제 진절머리가 났다.

 "오이카와. 그동안 수고했어."

 분명 위로의 말이었으나 그의 얼굴을 마주하니 결코 그렇게 들리지는 않았다. 오이카와는 말없이 웃어보였다. 입 근처에 살짝 걸린 미소가 흡족스러웠는지 선배는 감독님과 함께 병실을 나섰다. 오이카와는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씨가 쨍했으며, 불어오는 바람은 겨울답게 서늘했다. 오이카와는 다시 그 고통-차가운 쇳덩이가 들락날락거리는 끔찍한 수술-을 겪을 순 없다며 다시 누워 눈을 감았다. 씁쓸함에 눈물이 떨어졌으나 그마저도 메말라 비틀어졌다. 볼까지 흘러내린 눈물이 목을 타고 침대 시트로 떨어졌다. 작게 새겨진 흔적을 눈으로 훑으며, 가까이 흩어지던 산만한 시야를 애써 한군데로 모으고선 눈을 감았다. 눈물은 증오감에 뜨거웠다.

 잠은 들었으나 정신은 깨어있던 터라 감독님이 다시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그는 오이카와에게로 가서 한 번 지긋이 눈길을 주더니 다시 병실을 나갔다. 뒤 따라 왔던 선배도, 그 작게 찢어진 눈으로 침대를 응시하고선, 살며시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돌아갔다. 오이카와는 두 사람이 나간 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명확하게 귓가에 울릴 적에, 그 때 비로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그 후로 다른 동료라든가 대학 동기가 찾아오기도 했으나 다들 괜찮냐는 물음에 그쳤다. 매주 한 번씩 매니저가 찾아왔고, 가끔씩 시간 날 때마다 감독님과 선배가 찾아왔다. 입원 기간 사이에 취재진들도 몇몇 찾아와선 기삿거리를 갖고 돌아갔다. 그 사이에 기자회견도 한 번 있었고, 도중에 은퇴를 선언했다. 더 이상, 선수생활을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모두 제 부주의인 탓이니 죄송하다는 둥. 다시 한 번 열심히 응원해 주신 국민 여러분들께 사과드린다고. 정리되지 않은 언어를 내뱉자 분주하게 움직이는 취재진들 사이로 마이크가 불쑥 튀어나왔다. 여러 기자들 사이로 껴있는 키 작은 남성기자가 제 얼굴 가까이로 마이크를 들이대자, 예상치 못한 행동에 당황하기에 앞서 그에게서 질문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은퇴 후엔 어떤 일을 하실 예정인지, 혹은 다시 선수활동을 재개할 수 있을까에 관한 터무니없는 질문을. 하지만 준비되지 않은 질문이 돌아오자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입을 열기도 전에 경호원들로 부터 제지당하긴 했지만,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는 그를 보자 조금 미안하다는 생각도 없지 않아 들었다.

 퇴원하기 일주일 전쯤에는 이와이즈미가 찾아왔다.

 "너! 어떻게 된 거야."

 "미안, 너부터 찾았어야 했는데. 근황이 없어서."

 "손은."

 "보시다시피. 멀쩡해."

 전혀 멀쩡해 보이지 않는 손을 들어 보이며 웃어 보이는 오이카와의 얼굴에 괴리감이 피어올랐으나,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분명 억울함을 토로하지 못하는 친우의 고충을 아는 탓이리라.

 "기자회견도 했고……."

 "이 손도 그 새끼가 한 짓이냐?"

 "아냐 이건 그냥 내 부주의로…신경 쓰지 마, 이와쨩."

 유일하게 선배의 악행을 아는 이와이즈미였으나, 그도 또한 울분이 터져 제대로 대화를 할 수가 없었다. 이와이즈미는 거의 매일 병실에 틀어 박혀있었다. 하루는 이와이즈미에게 회사는 안 가냐고 묻자 돌아오는 대답은 생각치도 못한 것이었다.

 "이와쨩, 회사는 안 가?"

 "너 나두고 갈 수 있겠냐. 손도 이 꼴이라서 아무것도 못하는 놈인데. 내가 없으면 너, 시도 때도 없이 간호사들 호출해서 부려먹을 거 아냐. 그 꼴 보기 싫어서 온다, 왜."

 "질투했어?"

 "아니거든."

 쉬는 거 아니니까 걱정 마. 잠깐 점심시간에만 보러 오는 거니까. 너 또 다치면 큰일나잖냐, 얼빵한 놈아.

 이와이즈미의 장난스런 말투에 그만 피식하고 웃음이 났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를 보면서 진심어린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곧 손도 나아서 이제는 병원에 안 와도 될 것 같다는 아쉬운 말 한마디를 꺼내기까지에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이와이즈미는 무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이제 너 같은 놈의 병 수발을 안 들어도 되니까 기쁘다는 둥의 의미 없는 말을 내뱉으면서,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지만 이내 그는 퇴원하면 자신의 집으로 오라는 초대와 함께 다시 회사로 향했다. 병실 문이 드르륵 열리고, 그가 나가면서 다시 조용히 닫히는 문을 바라보며, 외롭게 텅 빈 병실을 한 번 둘러보았다. 가슴 한 켠이 아릿한 정적으로 휩싸였다.

 

❁❁❁❁❁

 

 다음 날, 퇴원 수속을 밟고 집으로 돌아와서 그대로 침대에서 뻗었다. 공식적인 발표와 두 번째 기자회견이 어제 이뤄졌으므로, 어느 채널로 돌려도 온통 오이카와의 은퇴기사 뿐이었다. 오이카와는 들고 있던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전원을 끄자 화면은 빛을 흡수했다. 그리고 방안에는 어두운 정적이 흘렀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났고, 제 기사가 잠잠해질 즈음에 TV를 켰을 땐 배구경기가 한창이었다. 항상 벤치에 앉아 있던 선배는 코트로 나갔고, 그는 굉장히 큰 성과를 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오이카와의 얼굴에 씁쓸함이 번졌다.

 팔은 분명 다 나았으나 뭔가 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이대로 집 안에만 처박혀 있으면 외로움에 정신이 이상해질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오이카와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향했다. 텁텁한 목을 물로 적시고 난 뒤, 식탁 위에 있던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일자리, 찾아볼까. 오이카와는 곧장 구인광고 사이트로 들어가 자신이 할 만한 일이 있는가를 우선 찾아봤다. 배구 코치가 제일 적당할 텐데. 그렇지만 아직까지 손목은 완치가 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굳이 그런 짓을 저질렀다가 이와이즈미에게 한 대 얻어맞을 생각은 없었기에 바로 창을 껐다. 이렇게까지 무능력했던가. 배구에 인생을 건 대가치고는 너무나 비약했다. 곧이어 다른 직장을 알아봤으나 다른 조건이 걸림돌이었다. 결론적으로, 쓸모없는 인간이었단 게다. 오이카와는 한숨을 쉬며 곰곰이 생각했다. 어렸을 적부터 주변 사람들이 추천하기로는, 토오루는 아무래도 얼굴이 잘 생겼으니까 가수-혹은 배우-는 어떠냐고 많이 들어왔으나 반반한 얼굴과 달리 그런 쪽엔 재능이 없었다. 하지만 뭐든 잡고 봐야했다. 오이카와는 며칠 전 들어온 드라마 섭외가 떠올라 담당 감독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오디션을 보러 방송국으로 나오란 간단한 문자가 왔다. 오이카와가 오지 않을 시를 대비한 대타도 있었고, 아직 주연도 정해지지 않았으나 감독님은 오이카와를 주연으로 쓰고 싶다고 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드라마의 주연이 배구 선수였고, 전반적으로 경험이 있는 오이카와가 주연을 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한 감독님께선 그에게 섭외 문자를 보냈으나 아직까지 답이 없었던 탓이었다. 하지만 일부 팬들로 부터 일어난 논란 중에는 아직까지 오이카와의 손이 완치되지 않은 상태라 그의 건강이 걱정된다는 등의 의견도 있었다. 담당 작가님께선 오이카와가 맡게 될 작중 인물은 프로가 아니라 아마추어고, 또 그런 미숙한 선수가 나아가는 과정을 그렸으므로 오이카와가 아니라 다른 배우로 써도 무방할 것 같다는 의견이 나왔으나 감독님께선 꽤나 고민하는 눈치였다. 아마 전화를 받은 그 시점에서 그는 결정을 끝냈을지도 모른다.

 오이카와는 준비를 끝마친 말끔한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선수 생활하기 전에도 몇 번 입지 않은 정장을 이제야 입다니. 오이카와는 불편한 듯 몸을 움직거리면서 차를 타고 방송국으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그가 찾은 곳은 2층 회의실이었다. 다들 배역 오디션을 보러 온 배우들로 가득 차있었는데 그 중에는 모델이나 가수도 적지 않게 보였다. 그런 쟁쟁한 인간들 사이에서 제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는지. 한편으론 의심이 되면서도 괜스레 기대감이 커졌다. 혹여나 자신이 주연으로 캐스팅 된다면 그거야말로 인생역전 아니겠는가. 오이카와는 관계자의 지시에 따라 회의실로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오이카와 토오루입니다."

 간단한 면접과 연기로 심사를 했는데, 애석하게도 오이카와는 연기를 그다지 잘하는 편이 아니었다. 오이카와의 연기력을 본 감독님께선 씁쓸한 미소를 한껏 얼굴에 머금고는, 아쉽다는 형식적인 인사와 함께 그를 돌려보냈다. 무거운 발걸음을 조심히 떼어내자 그간의 긴장이 전부 발끝으로 쏠린 것인지 저릿함이 몰려들어왔다. 그래도 한 걸음씩, 비장한 발걸음을 내딛으며 자신의 연기력에 대해 자책하고 있을 즈음, 아무 생각 없이 밖으로 나가려 문손잡이를 붙잡았는데 무슨 일인지 제 몸이 앞으로 쏠려나갔다. 그리고 누군가를 향해 부딪쳤다. 그가 제 몸을 감쌌기에 넘어지는 꼴은 면했지만, 뭔가 찝찝한 기분이 온 몸을 스멀스멀 기어 다녔다. 뭔가 했더니 그가 들고 있던 커피가 흰 셔츠에 묻어있었다. 거의 새 옷인데, 아쉽지만 오이카와는 그런 거에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하루 빨리 다른 일자리를 알아봐야했다.

 "아, 이런."

 그는 옷을 보며 난처해하더니 오이카와에게 되물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저희 가게로 가셔서 옷을 새로 맞추시는 건 어떠신지. 제 잘못인데, 이렇게라도 해드려야 할 것 같아서."

 "그, 옷이요?"

 "예. 디자이너, 마츠카와 잇세이입니다. 도쿄의 작은 상점에서 맞춤 정장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뭔가 낌새가 안 좋은걸 느끼긴 했지만, 우연이 이토록 틀어지게 된 계기는 단지 그와의 만남뿐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보다 놀라운 건, 그 사람에게 살짝 마음이 기울었다는 일일까. 첫 만남에 이토록 뛰는 심장이라니. 오이카와는 고장 난 제 심장을 계속 멈추려고 노력하며 그의 뒤를 따라 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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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렬한 여운은 연주회장의 분위기를 잡아 흔들고 있었다. 강하게 젖어드는 미묘한 울림이 귓가에서 일렁였다. 피아노에서 손을 좀체 떼질 않던 리에프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사뿐히 들렸다. 어느새 관객을 향해 공손히 인사하고선, 가벼운 손놀림으로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던 리에프는 관계자의 지시에 따라 다시 대기실로 돌아섰다. 아쉬워 하는 관객들은 리에프를 향해 장미꽃을 날렸으나 리에프가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경호원들이 제지하기 바빴다. 그에 한숨을 내뱉는 이들은 야쿠를 포함하여 다른 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이바 리에프. 일본을 대표하는 러시아 혼혈 피아니스트. 올해 23살, 다수의 여성팬을 보유하고 있으며 현재 개인 공연을 하며 일본 각지를 돌아다니는 중.

 야쿠는 입으로 리에프의 프로필을 줄줄 외우며 대기실을 지나치고 있었다. 오늘에야 말로 리에프를 만나고 말겠다는 강렬한 외침과 더불어 더 이상은 참기 힘들다는 생각과 함께, 어쩌면 우연히 마주치지 않을까라는 망상을 끼얹으며 터덜거리는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거기, 누구시죠."
 "네에, 관계잡니다만."
 "아, 그러십니까. 하지만 그린 룸 안으로는 들어가지 마십시오."

 쳇. 아쉬움에 돌아서려고 하니 그린 룸에서 리에프가 튀어나왔다. 아! 저 기럭지 하며 날이 선 반듯한 눈매마저도 매혹적이다 못해 아찔하다. 또, 저렇게 가지런한 손가락을 제 눈으로 직접 보게되는 날이 올 줄이야! 야쿠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넋을 놓은채 리에프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제 팬이신가봐요? 남자 팬은 드문데. 이런 팬서비스라도 괜찮으신지 모르겠네."

 그러더니 리에프는 야쿠의 손에 가볍게 입맞춘 뒤, 손을 흔들며 멀어졌다. 남자에게 손 키스? 먼저 든 생각은 떨리는 손을 주체 할 수 없었던 걸 어떻게든 진정시켜야 겠다는 거였고, 그 다음으로 떠올린 생각은 어떻게든 붙잡아야 겠다는 것이었다.
 
 리에프에게로 뛰어가다가 그의 몸으로 쓰러질 뻔 했으나 다행스럽게도 그가 멈춰섰기에 자신만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저 귀한 몸에 흠집하나라도 나면 안 되지, 암. 야쿠는 그래도 자기 몸이 넘어졌으니 천만다행이라 생각하며 몸을 일으켜 세우려는 순간, 앞에서 리에프의 손이 어른거렸다.

 "괜찮으세요? 뛰어 오길래 멈춰섰는데 넘어지셔서"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급하게 뛰어오시던데 저한테 무슨 볼 일이라도?"
 "아, 아니, 그게 그러니까…."

 웃으며 물어보는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두근거리는 심장은 멎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점차 흩어지는 시선에 리에프가 두개로 나눠졌다. 의식이 점차 무의식으로 전이 될 즈음 고개를 흔들어 제지시켰다. 리에프를 바라보며 정확하게 말했다.

 "저, 팬입니다! 그래서 제가 당신한테…,"
 "알아요. 제 팬이시니까 오신거겠죠?"
 "그래서 제가 당신한테…"
 "네. 저한테 뭐요?"
 "그, 그러니까…."

 직접 그를 대면하고 나니 말을 잇기가 껄끄러웠다. 당신에게 악보를 준 건 나라고 답하고 싶었는데, 야쿠는 말을 잇지 못하고 아닙니다, 로 짧게 그와의 만남을 끝냈다. 그도 호기심 가득 찬 눈으로 야쿠를 바라보다 이내 다시 그 간결한 감정을 거두고는 자신의 팬이라는 남성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고선 경호원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야쿠도 언젠가는 꼭 다시 그를 만나리라고 다짐하며 짐을 챙기고 작업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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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정은 고사하고, 오로지 증오로만 가득찼다. 단 한 가닥의 관심조차도 제게 남아있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늘, 그것도 항상 제 곁에 있었기에 어떻게든 떨어지려 해도 그럴 이유가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제 인생의 이정표와 마찬가지였다. 굳이 나서서 그를 밀치고 제지할 필요가 없었단 것이다. 쿠로에 대한 전반적인 느낌을 말해보자면, 엄마랄까. 딱히 그렇게 대단한 관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쿠로는 항상 나를 특별하게 생각했다.
 -난 쿠로를 좋아해. 근데 그거 알아? 난 쿠로가 싫어.
 이토록 변덕스러울까. 나는 머릿 속으로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되려 헤집으며 어지럽혔다. 산산조각나 떠다니던 기억의 잔해들이 서로 부딪혔다. 쿠로오의 얼굴이 떠올라 무의식적으로 휘젓다보니 어느새 쿠로의 손이 제 얼굴을 감쌌다. 쿠로오는 지긋이 바라보며, 그 특유의 능글맞은 말투로 뭔가를 지껄이더니 제 이마에 가볍게 입맞췄다. 그리 달갑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역겨운 것도 아니었다. 자연스러운 행위였기에 서로에게 딱히 흥분될만한 쾌락을 줄 요소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쿠로는 매일 장난식으로 제게 사랑을 고백하며 안아주는게 고작이지만, 그것마저도 기뻐하는 눈치였다. 실상은 게임을 하고 있는 나를 무릎에 앉혀놓고 얼굴만 감상할 뿐이지만.

 고등학교 시절은 그렇게 흘렀다. 매일 부활동, 혹은 수업. 그리고 게임. 딱히 새로울만한 일도 없었다. 쿠로가 성인이 되었을 때에 이제 부활동에서 벗어날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던 것이 리에프 때문에 깨어지긴 했지만. 다른 특별한 일은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따금씩 쿠로오가 학교로 찾아온 것 빼곤, 관심도 없었던 1년이 어느덧 흘러 성인이 되어 있었다.
 대학에 넣었는데 하필 같은 대학. 쿠로오가 같이 방을 쓰지 않겠냐고 물어왔기에 괜찮다고 답했으나, 기숙사에 자리가 없어서 결국 승낙했다. 룸메이트로 지내는 것도 몇 달 뿐이다. 언제까지고 그에게 의지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니던가. 쿠로오가 지긋이 쳐다보는 눈길에 움찔했으나 여전히 손은 바삐 움직였다. 예전처럼 나를 안아서 무릎에 앉혀놓고 게임을 하는 일도 드물었거니와, 그런 제안을 하더라도 거절 할 생각이었다.

 "켄마. 게임 좀 그만해."
 " ……."

 별 수 없이 게임기를 내려놓자 쿠로오가 제게 다가왔다. 옷매무새를 정리해 주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노트북 앞으로 다가가는 쿠로를 황망히 바라보며 다시 주저 앉아 게임기를 집어들었다. 그 순간 손에서 게임기가 사라졌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는데 언제 제 뒤에 왔는지 그가 게임기를 가져간 것이었다.

 "줘."
 "켄마…, 너."
 "응."
 "…하아. 아니다. 먼저 들어가서 잘게."

 그는 그 말을 뒤로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나도 시계를 한 번 보고선 방으로 들어갔다.

 쿠로오는 너무 감싸려고 하는 편이었다. 오히려 그 절제가 안 좋은 방면으로 나타난게 틀림없지만, 그게 진심인지 아닌지를 모르겠단 것이다. 오히려 자신은 더 분명하게 표현해 줬으면 좋겠는데 그러지도 않고. 또, 아기보는 마냥 막 하지말라고만 하거나 챙겨주는 일은 삼갔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전에도 신입생 환영회에서 술에 취해 잠이 들었었는데, 그때 과선배가 나를 들쳐업고선 집으로 갔을 때 쿠로오가 많이 화냈었다. 최근에도 담배를 피다가 걸려서 혼나기도 했고. 대체 왜 혼나야 하는지를 잘 모르겠단 것 빼곤, 그와 충돌하는 일은 그다지 없었다.

 "쿠로. 좋아해."
 "켄마? 무슨 소리야?"
 "쿠로가 나 좋아하는 거 알고있어."
 "……"
 "왜, 왜 아무말도 안 해? 진짜야?"

 쿠로가 날 좋아하면, 날 좀 더 만지고 싶어하고, 또 막 그런 짓도 하고 싶어하는 게 남자아냐? 나만 남자야? 쿠로, 혹시 거기에 문제있는 건.

 "조만한게. 뭐라 지껄이는거야? 내가 너를 좋아하는 것도 맞지만, 그런 짓을 하려고 너를 사랑하지는 않아. 내가 너에게 해주고 싶은 건, 마음 깊이 사랑하고 그저 묵묵히 안아주면서 네가 마음의 안정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거야."
 "……."
 "그리고 그건, 서로가 마음 깊이 사랑하고 있을 때, 그 때."

 그 때 하자.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렁였다. 아아, 이래서 난 쿠로가 싫어. 근데 날 정말 사랑하기는 하는거야? 전에 술 마시고 같이 왔던 여자랑 바람난 건 아니고? 점점 하고 싶은 말은 미궁 속으로 빠졌다. 일그러진 제 표정을 봤을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는 그의 손길이 썩 나쁘진 않았기에 추궁하는 건 관두기로 했다.

 쿠로가 나를 사랑하는 것 만큼 나는 쿠로를 싫어해. 그리고 거기서 반으로 나눈 만큼 사랑해.

 오히려 증오가 마음의 절반을 차지하지만 사랑을 속삭이는 이유는 내가 당신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나를 사랑해서 일테다. 증오는 점차 절반으로 줄어들테고, 애정은 점차 배로 늘어날것이며, 그 때 마저도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있을는지.

 애정은 점차 식어가고 증오는 타오르다가 사그라들었다. 결국 애증조차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 다다랐다. 쿠로,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그렇다고 미워하지도 않아. 그런 나를 당신은 사랑하고, 또 미워하겠지.

 결국은 애증이다. 서로의 관심을 짓누르며, 서로를 탐하다가 헤어지는 그런. 애정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이 증오로 변질되어 머릿속에 남아있다.

 쿠로, 사랑해. 그렇지만 난 쿠로가 미워.
잇새로 흐르다 못한 말들은 혀끝에서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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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목에서 핏물이 떨어질 때면 내 온갖 신경이 마구 치솟아 오르면서 막, 막 이상한 감정이 차올라."

 당신이 제게 했던 말은 어느새 찢어진 붉은 입술에 먹혀 짙게 터져나오는 호흡에 갈라졌다. 그는 제게서 얻어내려고 하는 게 적지 않았으나 이토록 어이없게 단번에 저를 잡아먹으려 했던가? 그의 손길이 제 턱선을 따라 가슴 팍으로 내려가더니 어느새 허리에 다다랐다. 그는 끈적한 손길로 제 허리를 감싸더니 또 다시 제 목부근에 머리를 박고선 흐르는 핏물을 조심스레 핥아먹고 있었다.

 "당신 피는 야해서 좋아. 최근에 먹은 피 중에 당신 게 제일 좋았단 말이지."
 "잔말말고, 빨리 드시고 꺼지시죠."
 "너무 야박하네. 말했잖아. 이제 당신 피 말고는 먹을 피가 없다고. 다른 피는 다 더러워 보여서 말이지."
 "그냥 저를 죽이시고 피나 실컷 먹으신 뒤에 버리시는게,"
 "너를? 너를 죽이란 말이야? 대체 왜? 몇 일만 쉬면 새로운 피가 샘솟을 텐데, 내가 뭘 위해서 그래야하지? 한 순간의 행복을 위해 내가 당신을 죽여야 한단 말인가?"
 "아님 말고요."

 당신은 아마 제 피가 탐나기 때문에 내 곁에 머무르는 거라고 생각했다. 갈 곳 없는 나를 붙잡아 집을 내어주었고, 음식도 건네주었다. 나는 당신에게 피를 내어주는 것으로 삶을 연명하고 있었다. 그는 꽤나 친절했다. 고작 피를 먹겠다고 충분한 음식을 매일 내어준다든가, 다정하게 제 마음을 안정시키는 등의 행동은 오히려 연인같이 보이기도 했다. 정작 그는 아무 생각도 없어보였지만.

 "저기요, 뱀파이어 씨?"

 나는 아직 그의 이름을 몰랐다. 딱히 대체할 호칭도 찾지 못했기에 뱀파이어라 불렀다. 언젠가 그가 이 곳을 비우는 날이 온다면 그 때는 이 빌어먹을 저택을 빠져나가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몇 주 동안 그는 나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꼼짝없이 뱀파이어에게 잡혀있어야 했다.

 "왜 그러지? 부탁이라도 있는건가?"
 "그건 아니지만, 언제까지 우리가 이렇게 있어야 하죠?"
 "아, 밖에 나가고 싶은건가."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한 손으로 자신의 입술을 훑으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어쩌면 들리지도 않을 정도의 작은 소리였기에 그가 뭐라 하는지는 하나도 듣지 못했으므로, 안타깝지만 접어두는게 나을 듯 싶었다.

 "아니에요. 그건 아닌데."
 "그럼?"
 "오늘이 몇 일이죠?"
 "9월 25일."

 예? 잘못들은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9월 25일이면 그를 처음 골목에서 마주했을 때와 같은 날짜였다. 혹여 1년이 지난 건지 물어봤으나 확실히 그 날이었다. 시간이 멈춰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다시는 이 곳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는게 아닐까, 하고도 생각했다. 여전히 그는 허기짐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일그러지던 제 얼굴을 보던 그의 표정이 장난기 가득한 미소로 번졌다. 그러더니 양껏 걱정을 껴안은 제 양 뺨에 손을 가져다 대고선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감촉에 놀라기에 앞서, 그의 입술이 움직거리는 종착지를 찾아가니 더 이상 놀랄 수는 없었다.

 "거짓말이야. 뭐 그리 실망해? 오늘 당신이 들어오고 나서 딱 2주 지났어."
 "그, 그렇습니까."

 농담은 되도록 하지 말아주시죠. 당하는 나는 심장 떨리니까. 또 얼굴은 왜 저렇게 생겼는지 심장에 무리가 갈만한 외모라서 계속 제 심장은 열심히 뛰고 있다. 냉철한 저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은 여전히 싱글거리며 능글맞게 대꾸하고 있지만.

 "당신, 근데 내 이름 안 궁금해?"

 왜 안 물어보는거야? 그는 귓가에 대고 제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별로. 피만 주다가 나갈꺼니까요."
 "아냐, 기억해두는 게 좋아. 당신이 언제고 나를 마음 속으로 기억할 때마다 이름을 부른다면, 그 때라도 나는 당신을 이 저택으로 다시 데리고 올 생각이거든."

 당신도 아마 내가 그리워질껄? 능글맞게 웃는 그에게서 달아나려고 하자 그는 제 몸을 벽 쪽으로 밀치고선, 또 다시 입을 맞춰왔다. 평소보다도 더 격렬한 키스였다. 어쩌면 그간 했던 접문 중에서도 가장 여운이 길게 남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터진 입술에서 비릿한 피맛이 감돌았다. 그는 제 피를 보고도 달려들지 않았다.

 "마츠카와 잇세이. 기억해두는게 좋을거야. 그럼, 잘가. 오이카와."

 그는 미련 없이 제 몸을 문 밖으로 밀쳐냈다. 눈을 뜨니 전에 그와 만났던 골목이었다. 휴대폰 액정이 나타내고 있는 시간은 오후 9시. 날짜는, 9월 25일이었다. 한 순간에 몰려드는 무력감과 황당함이 머릿속으로 가득차고 있을 즈음, 그의 이름이 생각났다. 마츠카와 잇세이. 아무 감정도 들지도 않았고, 어떤 느낌이 들지도 않았다. 그냥 매정하게 말하자면 허상이었다.

 나는 당신을 본 적이 없어. 언제까지고 나는 당신과 아무런 연이 없는 평범한 인간일테고, 당신은 그저 잠시 내가 골목에서 빈혈이 나서 까무룩 쓰러진 차에 제 꿈 속에 나타난 무의식일 뿐이다. 난 아직 당신을 기억하고 싶지 않다.
 아니, 그 언젠가 내가 당신을 떠올린다 하더라도 다시 만날 마음은 없는거야.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나를 버리는 사람하고는 다시 만날 생각이 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마츠카와를 다시 본 건, 그로 부터 이틀 후였다.



 "오이카와?"
 "으음, 누구?"

 깨어나보니 그의 저택 안이었다. 마츠카와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어쩌면 환청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잠들려고 했으나 맞닿아오는 그의 손길에 이는 꿈이 아니라고 직감했다.

 그의 선명한 숨소리가 제 귓가로 파고 들고 있었다. 얼굴을 제 목에 파묻은채로 짐승처럼 피를 갈망하다가 결국 유혹을 참지 못하고 푹, 이를 박았다.
 피가 흐르는 감촉에 그의 머리를 끌어 안고선 고통을 내뱉었다. 어느새 노곤해진 몸은 그의 손이 지탱하고 있었고, 그는 제 몸을 잡아선 침대에 다시 눕혀주었다.

 "봐. 넌 다시 올거라고 했지? 이제 벗어날 수 없어."
 "이건 꿈입니다. 그래 이건 꿈이겠지."
 "꿈? 꿈 같은 소리 하네. 넌 이제 내 품에서 못 벗어나, 오이카와."

 저렇게 말하는 재수없는 놈에게 화가 나야하는게 분명한데 피를 빨려서 그런지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아아, 나는 탄식했다. 그의 몸을 껴안으며, 피의 저주에 잠식되어가면서. 점차 감정의 몰락에 처연히 대처하며.

 감정회로의 손상이 일어났다. 억지로 맞지 않는 곳에 끼워넣었다. 그럴 수록 이상하게 당신이 제 눈에 어른거렸다. 정말 고장난 걸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이 현실이 꿈이 아니길 간절히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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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 밤 옆집 테라스에서는 담배연기가 풀풀 피어오른다. 하얗게 물들어간 연기 한 송이가 거무죽죽한 공기를 가른다. 네온사인이 붉게 물든 도시 한 가운데의 아파트에서, 작게 마련된 공간이 테라스가 아니던가. 요즘 매번 기침을 달고 사는 것도 그 남자 때문이 아닐지 의심이 되기 시작했다.
 남자는 테라스에 있는 작은 선반 위에 라이터와 담배를 놔두고 다녔는데, 그 선반은 제 집에서 닿을 수 있는 거리라서 혹여나 그가 나갔을 때 슬쩍 빼오면 안될까 생각도 해봤다. 옆집이라 그런지 붙어있는 탓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테라스가 아주 가까이 붙어있었다. 정 안되면 넘어가서 가져오는 수밖에. 하지만 매번 제 인기척에 그는 테라스로 나왔으므로, 재빨리 뺏아올 생각조차도 해본 적 없었을 뿐더러 빼앗아 온다 하더라도 그는 아마 다시 담배를 사러 앞의 편의점에 갔다 왔을테다.
 담배피는 것까지 막을 생각은 없으나 적어도 제가 나와있을 때 만큼은 자제해 줬으면 좋겠다. 그는 항상 제가 밖에 있는 시간을 노려 조심스레 나와선 능청스레 인사를 건넨다. 그러고선 보란듯이 담배를 꺼내 물고, 연기를 뻑뻑 피워댄다. 제가 질색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는 표정 하나 까딱없이 그저 슬며시 웃으며 저를 마주할 뿐이었다.
 몇 일 이야기 하다보니 그에 대한 몇가지 정보를 알게되었다. 하이바 리에프. 나이는 28살. 제 나이보다 딱 2살 어렸다. 회사는 이 근처 어디. 우연인가? 제 회사와 가까운 것 같았다.
 옆집인데 친하게 지내자고 먼저 말을 걸어온 건, 제 쪽이 아니라 그 남자였다. 그는 조심스레 손을 건넸다. 제 테라스로 넘어온 길쭉한 손이 어른거렸다. 제가 그 남자를 의아하게 바라보자 그는 어서 악수하자며 재촉했다. 그는 미묘한 미소를 흘기며 다시 담배를 피기 시작했다.

 서늘하게 부는 바람이 연기를 흩날렸다. 그가 피던 담배 연기가 제 쪽으로 날라오자 갑작스런 상황에 콧속으로 들어온 텁텁한 담배향기가 목을 간질였다. 재채기가 튀어나오고, 옆에선 안절부절 못하는 그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나는 코를 틀어막았다. 그는 담배를 비벼 끄고서 제 테라스로 넘어오려고 했다. 나는 손을 들어 급히 그를 제지했다.

 -괜찮습니다. 신경쓰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혹시 어디 안 좋으신건 아님까.
 -호흡기가 좀 안 좋을 뿐입니다. 담배도 조금 힘들고요.

 그가 언젠가 제게 담배를 권유한 적이 있었다. 물론 나는 거부했고,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혼자서 뻑뻑대던 기억이 있었다. 그게 불과 사흘 전인데. 굳이 그 사람에게 신경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굳이 담배를 피지 않겠다고 하며 제가 있을 때만큼은 담배를 피지 않았다. 다른 때에도 정말 안 피는지 의문스러웠지만, 요즘들어 그의 곁에서 나는 냄새는 담배냄새가 아니었다. 하지만 훨씬 더 질이 나쁜 냄새였다. 싸구려 향수 냄새, 라고 하면 알아들을까. 독한 꽃의 향기가 코 근처를 간질였다. 직접적인 불쾌함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그의 몸에서 나던 담배냄새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질 나쁜 냄새에 대한 출처는 끝끝내 들을 수 없었다.
   
 -있잖아요, 그 쪽, 애인있슴까?
 -없어.
 -인기 많으실 것 같은데.

 귀여워서. 그의 잇새로 튀어나온 그 단어에 움찔 반응하더니 뒤로 물러나자 그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나선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제 볼이 붉게 달아오른 것도 인지하지 못했으며, 다시 말을 건네기 까진, 조금 힘겹게 대꾸한 탓도 있을테다.

 -그럼, 너는?
 -저 말임까? 음, 애인은 없는데. 신경쓰이는 사람은 있슴다.
 -누군지 물어봐도 돼?
 -작고 귀여운 사람임다. 부드럽고, 고운.

 아마 그 싸구려 향수의 주인공인 듯했다. 작은 여자가 취향이라니. 역시 자신의 성향과는 반대의 사람을 좋아한다는 그 말이 맞는 걸까. 나는 쓴 웃음을 얼굴에 띄우고선, 간단한 인사와 함께 집으로 들어왔다. 그도 조금있다가 이내 추위를 느끼며 들어가는게 느껴졌다. 심장은 쿵쾅대고 있었다.

 몇 일 후에 그를 봤을 땐, 사람의 몰골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피폐해진 얼굴과, 녹아내린 다크서클, 수척해진 얼굴을 보자 나도 모르게 동정심이 생겼다. 테라스에는 이제 담배가 아닌 술병이 나뒹굴고 있었다.

 -너 뭐 때문에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신거야, 대체!
 -머리가 너무 아픔다.
 -무슨 일인데.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봐주지 않아서여.
 -아아, 연애문제? 그 때 작고 귀엽다는 그 사람?
 -예.

 이거 꽤 곤란한 상황이었다. 저 남자는 뭘했길래 아직까지도 고백을 못한걸까. 그냥 남자답게 저질러버려! 하고 조언해 주고 싶었으나 그러기에는 조금 무리가 없지 않아 있었다.                                                                                                                                                                                                                  
 -그 여자는 네가 좋아한다는 거 알고 있어?
 -아, 그 여자. 모르겠죠 아마.
 -그럼 그냥 남자답게 해버려! 뭘 고민하고 앉아있어.
 -그 사람은 나보다 너무 여려서 부서질지도 모르겠거든여.

 그게 당신이란 걸 왜 몰라. 그 남자의 입이 뭐라 중얼거리긴 했으나 나는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그를 토닥이며 술은 그만 마시라는 충고와 함께 집으로 돌려보냈다. 20대의 연애란 좋구나. 나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고선 찬 바람을 느끼며 밤을 보냈다. 

 이틀 후, 그의 얼굴은 좀 나아진 듯 했으나, 끈적하게 달라붙어오는 그 시선은 어딘가 불순한 것이었다. 나는 애써 웃으며 그에게 말을 건넸다.

 -그 여자랑은 어떻게 잘 되고 있어?
 -예? 잘 모르겠슴다. 아직도 못 물어봐서.
 -답답하네. 나 같으면 바로 물어볼텐데. 20대면 좀 더 불꽃같은 연애를 즐겨야 하지 않나? 왜 그렇게 고민해. 그 여자가 너 싫대?
 -모르겠슴다. 연상이라서 대하기도 힘들고.
 -아, 연상.

 연상의 여자라. 너도 취향한번 독특하다. 적어도 29. 아님 30대라는 얘긴데. 그 정도 나이면 연하나 만나고 있을 시간은 없을텐데. 그래도 저런 남자면 만나볼 가치는 있겠지. 그건 제 생각이 아니라 그 여자의 생각일테니.

 -그래도 술은 그만마셔. 몇 일째 술만 마시고 있잖아.
 -그럼 마지막으로 딱 한 병만, 당신이랑 마시면 안될까여.
 -여기서? 그래, 그럼.

 그러더니 그가 조심스레 들고 나온 건, 와인잔 두개와 비싸보이는 와인 한 병을 들고 나왔다. 자주빛의 액체가 조심스레 흘러내렸다. 그의 것을 따라주고 약간 몽롱한 기분으로 와인을 들이켰다.

 -사실 제가 좋아하는 건 남자에여.
 -뭐라고?
 -그렇다고 하면, 미친 것 같다고 생각하시겠죠?
 -아니.

 별로. 취향이란 건 다 다른거니까. 제가 웃으며 대답하자 그제서야 좀 밝은 얼굴로 저를 마주했다. 헌데 그것이 조금 이상한 것이 그의 끈적한 시선이 달라붙었을 뿐더러 와인을 놓고 테라스 사이에 붙어오던 그의 손을 느꼈기 때문일게다.
 그의 입술이 제 것을 향해 다가왔다. 혀가 밀고 들어오던 끈적한 느낌에 그는 혀 끝으로 제 입천장을 쓸어내리더니, 들고 있던 와인 잔을 옆 선반에 잠시 내려놓고 제 머리를 끌어당겼다. 강하게 얽혀드는 그의 혀가 축축하게 서로의 것을 쓰다듬었다.
 나는 당황할 새도 없이 그의 혀에 농락당해야 했다. 야릇하게 쓰다듬는 그의 손은 초조함에 잠겨있었다. 매만지고 있었으나 그것은 무언가를 갈망하는 듯한 애절함이 녹아 있었다. 그의 입술 사이로 서성이는 제 혀도 그러했다.
 그의 입에선 담배냄새가 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달콤한 향이 났다. 사탕인가. 거기에 약간 붉게 상기된 눈도 뭔가 귀엽게 보이고. 오히려 이상한 건, 제가 이 상황에 저 남자랑 왜 키스를 했냐는 것인데. 그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느낌이었다.

 -저 사실 당신을 좋아함다. 당신을 처음 봤을 때, 그 때 부터. 저 싫어졌겠죠?
 -아니.
 -저 그럼 당신한테 고백해도 되나여. 제 방식대로, 야쿠 상이 말했던 것 처럼 남자답게.

 그렇게 우린 다시 입을 맞추었다. 자연스레 넘어가는 의식의 흐름이 무의식을 덮칠 때 즈음, 우리는 테라스에서 달콤한 키스를 하고 있을게다. 그것이 정말 말이 되지 않는다거나,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아니라면, 나는 조심스레 그의 얼굴을 매만지고, 그는 상체를 굽혀 제 입술에 살며시 입맞출게다.
 서로의 거리는 그렇게 짧았다. 하지만 인연은 길었다. 사랑하는 나의 연인. 나는 당신과 나의 입술이 닿는 거리를 알고 있다. 그것은 거의 닿을것 같으면서도 애절하게 멀어져가서 당신이 나를 꽉 붙잡아 주었기에 제가 닿을 수 있었다는 걸. 당신은 과연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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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n after you

 

마츠×오이


*각애 외전


 그 날은, 평소와 다르게 꽤나 고요했던 날이었으나 또, 평소와 다르게 다사다난 했던 날이었다. 하늘은 여느날과 같이 청명한 빛을 머금고 있었고, 구름 한 점 없이 내리쬐는 햇빛은 무더위에 적합했다. 하지만 여전히 더위에 찌들어 건물 안에 처박혀 있는 제 신세는 자유롭지 못했다. 그의 가호아래 밖으로 나다니지도 못하고 에어컨 바람이나 쐬는 신세라니. 누가 들으면 부럽겠다고 구미가 도는 제안일지도 모르겠으나, 별로 달갑지만은 않는 말이다. 아마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왔다면, 그가 과연 이렇게까지 편의를 제공해줄 의향조차 있었을지도 의문이다. 아아, 나는 탄식했다. 부디 나를 편히 놓아줬음 좋으려만. 애석하게도 제 바람은 이미 그의 입맞춤에 묻혀버린지 오래였다. 이제는 맨정신으로 그를 마주하는 일도 힘들었다. 죽여달라고 애원해도 그가 들고있는 총으로 제 몸만 죽이고 정신은 살려놓을 놈이다. 나는 체념한 상태로 차 안으로 들어오는 그를 맞이했다.

 "토오루"
 "무슨 일이시죠, 보스."
 "넥타이가 삐뚤어졌어. 잠깐 나와, 다시 매줄게."

 그는 한 손으로 나를 차 안에서 끄집어내더니 능숙한 손길로 넥타이를 매기 시작했다. 그의 손길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끈적해지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으나 금새 그는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뒷좌석에 올라탔다. 그는 항상 반듯한 모습으로 회사에 가곤 했으므로, 흠잡을데가 없었지만 나는 익숙하지 않은 옷차림을 애써 정리하며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굳이 일도 하지 않는 내가 정장을 입을 이유는 없었던 것 같지만,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좀 더 신경쓰는 듯한 분주한 모습이었다. 그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조금 제 모습이 초라해보이기 그지없었지만 그도 그뿐이었다.

 "그리고 보스는 조금 딱딱하지 않아? 네가 조직원도 아니고, 굳이 그런 호칭으로 날 부를 필요는 없잖아."
 "아직은 어색하니까요"
 "어색하긴, 어제까지만 해도 반말 찍찍 써대는 사이 아니었나?"
 "죄송합니다. 그땐 제가 미쳤나 보,"
 "그러지 말고, 기분좋게 갔다 올테니까 내 이름 불러줘. 오늘은 그닥 내가 좋아하지 않는 손님이 올 예정이라."

 좋아하지 않으면 거래를 잡지 않으면 될 것 아닌가.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외면하고선, 입도 꿈적 안하고 회사로 가려고 했다. 그의 긴 손가락이 제 볼을 살짝 찔렀다. 어리벙벙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피식 웃으며 제 손을 붙잡았다. 그의 끈적한 숨이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 들었다. 그는 제 의도를 파악했는지 이름을 불러주지 않으면 이 손을 놓지 않겠다는 듯, 계속해서 제 옆으로 달라붙어왔다. 그 사이 이미 차는 회사 앞에 도착해 있었다. 그는 아쉽다는 듯 제 손을 놓고, 차에서 내렸다. 그는 제 손을 잡았고, 나는 그의 에스코트 아래 차에서 내렸다. 오늘은 왠일인지 어디로 가라는 그의 명령이 없었고, 그는 계속해서 제 손을 붙잡고 있었다. 오늘은 또 무슨 속셈이지. 그의 손은 여전히 끈적하게 제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고 있었다. 약간 소름이 돋는 터라 잘게 손이 떨렸지만, 그는 별로 개의치 않는 듯 했다.
 오늘은 그도 사장실로 향했다. 평소 같았으면 회의실이나 다른 장소로 가서 거래를 주고 받았을텐데, 오늘은 꽤나 중요한 사람과 거래를 하는 것 같았다. 잘 모르겠지만 감이 그랬다. 그런데 이제와서 그의 이야길 꺼내는 이유가 왠지. 사장실에 들어서자 마자 그는 제게 이런 이야길 꺼내왔다.

 "난 가끔 당신이 떠날까봐 무서워. 당신 마음이 아직 그 쪽에 있거든. 그 놈,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해?"
 "…잘 살고 있어?"
 "아쉽지만, 죽었다는군."
 "개만도 못한 새끼!"
 "입도 적당히 놀려. 그 입 잘라버리기 전에."
 "씹…읍."

 제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잇새로 흘러나온 짧은 외침은 그의 눈빛에 사그라들었다. 그는 제 귀에 대고 낮은 톤의 목소리로 속삭였다. 놀라지 말고 들어, 토오루. 오늘 그가 이 곳으로 올거야. 하지만 기대는 하지 않는게 좋아. 그는 살아있지만, 너를 알고 있는 이와이즈미 하지메는 죽었거든. 그는 이미 너를 기억에서 지웠을테니까.

 조금 멍한 상태로 그를 바라보자 그는 별 말없이 사장실을 떠났다. 같이 올라온 건, 이 말을 하기 위해서였나. 그럼 분명 그가 좋아하지 않는 손님이란 건, 이와쨩을 의미할테다. 하지만 제가 회의실로 간다고 해서 그를 찾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고, 아마 도착하기도 전에 그의 손길에 붙잡혀 다시 그의 집에 처박힐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조용히 기다렸다 그에게 경과를 물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수확일게다. 이와쨩이 살아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할텐데.
 다리에 힘이 풀려주저 앉았다. 정신없이 멍하니 10분 정도를 그렇게 있었을까. 사장실의 문이 열리는게 들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비서실로 들어오는 문이 아니라, 간이로 만들어 놓은 작은 문으로 들어 온 남자는 이와이즈미 하지메였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에게로 달려갔고, 그 또한 제 얼굴을 보고선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이와이즈미는 급하게 제 팔목을 잡아채고선 창문을 깨고 뛰어내렸다. 얘가 약을 먹더니 미쳤나, 하고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다행히도 앞 건물과 높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아서 간신히 옥상에 착지할 수 있었다. 그의 회사를 바라보니, 사장실에서 제 모습을 응시하는 마츠카와의 흔적이 여실하게 깨진 창문사이로 드러났지만, 또한 그 눈빛이 살벌하기 그지 없었으나 나는 도망치기 바빴다. 이제 그의 손에 붙잡혀 사는 건, 치가 떨리는 제안이었다.

 "오이카와, 그 동안 잘 있었어?"
 "응. 이와쨩도 별 일 없었지?"
 "저 새끼가 준 마약 참는 것 빼곤 별로."

 그래도 가끔 발작은 해서 한 알씩 먹어줘야 해. 저 새끼가 뒤쫓아 오진 않겠지? 다른 마약밀수업자를 알아봐야 하나.
 이와이즈미는 정리되지 않은 언어를 내뱉었고, 달리던 도중 그는 무언가가 목에 걸렸는지 한손으로 목을 감싸며 , 한 손으로 주먹을 쥐고 가슴을 연신 쳤다. 답답한 가슴을 부여잡으며 도시 한복판을 달리고 있을 즈음이었다. 어디선가 미약하게 피냄새가 났다. 옆에서 나는 냄새였다. 조심스레 고개를 돌리자 이와이즈미는 켁켁대며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이는 핏물에 물들었고, 나는 조심스레 그에게 다가가서 등을 두들겨 주었다.
 일어날 수 있겠어? 나는 그를 붙잡아 일단 골목으로 끌고 갔다. 이대로 있다가 경찰에게 들켜 병원에 간다해도 그의 신분 -신용불량자에 마약중독- 이 들킬 수 있었으므로 어떻게 보면 그 사람까지 연결될 수 있었기에, 복잡한 일은 피하고 싶었다. 나는 조심스레 옆의 골목으로 그를 데리고 갔다.

 그 순간, 그에게로 총탄하나가 날아들었다. 토해내던 입 속에서 울컥하고 핏물이 솟구쳤다. 가슴을 뚫고 지나간 총탄은 제 앞에 떨어졌고, 눈 밑이 벌겋게 충혈된 이와이즈미의 사체는 제 앞으로 고꾸라졌다. 오이카와는 쓰러진 이와이즈미를 한번 즈윽 훑고선, 다시 고개를 들어 제 앞에 서있는 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분명, 제가 알고있는 이였다. 마츠카와 잇세이. 벗어나고 싶었던 족쇄와도 같은 사람.

 "도대체 왜 죽인거야? 살려 놨으면 좋았을텐데! 살아있었는데!"
 "마약 중독이랬지? 그 새끼, 널 데려 가서 장기매매 업자에게 넘겨줄 심산이었던 것 같은데. 아님 네 장기를 자기 몸에 이식하려는 생각도 했었겠지. 약 때문에 많이 망가졌거든."
 "그럼…."
 "너 죽일 생각은 없으니까, 그냥 나한테로 와. 도망치지 말고."

 갑자기 제 자신이 한심해졌다.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 그를 밀어내려고 했던가. 아아, 마츠카와! 나는 조심스레 그의 손을 붙잡았다. 죄송해요, 다시는 도망 안 칠게요. 믿을 사람 없다는 걸 다시 한 번 절실히 깨닫고 나서는 더 이상 도망칠 여력도 없다. 나는 그의 사죄의 의미로 그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으나, 그가 제게 제안한 것은 터무니 없는 것이었다.

 "이름, 불러줘."

 아직도 이름에 집착하고 있는 걸까. 나는 별 수 없다는 듯, 살며시 미소를 흘기며 그에게 답했다.

 "잇세이."
 "좋아. 토오루. 이제 밤에도 그 상태로 울어줘."

 뭔가 이상한 방향으로 대화가 흘러가고 있음에 틀림없었지만, 나는 무턱대고 끄덕였다. 분명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데 남아있던 여유가 다 사라진 탓이리라. 나는 그에게 안겨있는 채로 그에게 말했다. 좋아합니다. 이제는 진짜 도망치지 않을테니까, 나 미워하지 말아주세요.
 과연 그런 말로 그의 마음이 풀릴 지는 의문이었지만, 그를 이름으로 부르는 건 조금 보류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마피아 보스 이름을 막 부르는 건, 뒤가 조금 찝찝했다. 그래서 그냥 달링을 호칭으로 정하고 마무리했다. 그는 제가 달링하고 부를 때마다 조금 부끄러워 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오히려 즐기는 마음으로 부르고 있다.

 당신이 온전히 제 마음 속으로 들어올 그 날까지 난 당신에게 고마워하고 사랑할테다. 당신이 내 뒤를 뒤쫓듯, 나도 당신의 마음을 뒤쫓으며. 이제는 어느 누구의 마음에도 현혹되지 않고, 오로지 당신만을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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