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새기다

각애(刻愛) 스핀오프

 

 

 

마츠×오이

 

 

저번 여름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더웠으나, 그나마 나았던 점은 회사에 틀어박혀 에어컨이나 틀어놓고 남은 잔업을 처리하기만 하면 된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이번 여름은 조금 달랐다. 아무 일도 하지않고 있기에는 너무나도 지루했던 터라, 나가서 산책이라도 하고픈 마음이었다. 대낮부터 아무것도 없는 건물에 붙박혀 있는 것은, 결코 원하던 바가 아니었다. 그나마 에어컨이라도 달려있어서 다행이지, 그것도 아니었으면 여름 더위에 쪄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의 사무실은 단조로운 편이었다. 적어도 전에 있던 회사와는 전혀 달랐다. 가끔씩 지시를 받으러 올라갔던 사장실의 풍경과도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간결하게 책상 하나가 있었고, 그 위에는 요즘에는 쓰지 않을 법한 깃펜 하나가 잉크 통에 세워져 있었다. 또한 접대를 위한 테이블과 소파 외엔 어떠한 가구도 찾아볼 수 없는 간결함이 흐르고 있었음엔 틀림없었다.
그렇지만 그 밖의 비서실엔 서류들이 넘쳐 났는데, 그의 비서는 꽤나 성실한 편이라 오전에는 거의 일을 다 끝내곤 했다. 아니, 하는 일이 그닥 없어서 그런건지도 모르겠다. 아무렴, 유령회사에서 무슨 할 일이 있겠는가. 여튼, 그의 사무실은 정갈하게 정돈 되어 있음이 확실했다. 적어도 어제까지는.

오늘 그의 사무실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따분한 분위기를 풍기며 차갑게 식은 책상과 딱딱한 가구만이 나를 반길 뿐이었다. 책이라도 읽어야 할 것 같아서 품속에 안고 왔기에 망정이지, 책이라도 가지고 오지 않았더라면 또 적막한 시간을 보내야 했을 것이다. 그는 가끔 거래를 할 때 나를 데리고 같이 나오곤 했는데, 그는 내가 도망갈 것을 걱정했는지 사장실에 보안장치를 걸어놓고는 거래가 끝날 때까지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더운 여름, 에어컨이나 틀어놓은 사무실에 박혀 지내는 것도 나쁘진 않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전에는 특별하다 느끼지 못했던 자유가 간절해지자 옥상에서 뛰어내릴 성 싶었던 제 계획도 그의 손에 산산조각나 부서졌다. 죽겠다 다짐했었던 그 허망한 각오마저도 사라진지 오래다.

"물이라도 드시겠어요?"

그의 비서였다. 그와는 초면이었다. 솔직히 말해 달가운 편은 아니었다.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분홍색 머리카락은 오히려 자신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고, 그의 존재마저도 전 애인-그의 비서직에서 해고당했다-이 떠오르는 탓에 쉽게 웃어보일 수만은 없는 법이었다. 하지만 적개심을 드러낼 의도는 없었기에 한껏 치장된 웃음를 내보이며 미소지었다.

"네. 감사합니다."

그는 조용히 비서실로 가서 물을 한 잔 가지고 왔다. 안에는 얼음이 한 가득 담겨있는 채였다. 나는 그에게서 물 잔을 받아들고선 조심히 한 모금 들이켰다. 차가운 물이 목으로 시원스레 넘어갔다. 그는 빤히 제가 물 마시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서도 신경쓰지 않으려 애썼다.

때 마침 거래를 끝낸 마츠카와가 들어왔다. 그는 귓속말로 비서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잠시 귀 기울여 듣다가 인사를 꾸벅 하고는 비서실로 다시 돌아가는 그 비서를 황망히 바라보다가, 제 시선은 그에게로 향했다. 그는 입가를 만지작거리다가 시선을 얼음만 남아있는 물잔으로 고정시켰다. 움직이는 그의 눈동자가 고요하게 빛났다.

"더워. 밖에 나가면 안 돼?"
"안 돼. 지금 폭염이라 나가면 죽어. 그냥 여기 있어. 에어컨도 틀어놨는데, 진짜로 더워?"
"더워."
"그럼 시원하게 해줄게."

그는 제 몸을 소파위에 눕히더니 얼음이 든 컵을 집어들었다. 그대로 몸에 부으려는 건가. 조금 무서워지기도 했으나 아마 그는 그러려는 의도가 아니었으리라. 물은 다 마셨지만 얼음이 맨 살에 닿으면 아마 차갑다기 보단 아프단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나는 손을 들어 그를 제지하려고 했으나 두 손목은 그의 한 손에 잡혀있었고, 그는 물 컵을 들고선 제 위로 그의 몸을 겹쳐왔다. 결국 그가 덮치는 자세로 제 몸을 깔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거 풀어줘. 더우니까 손 좀,"
"더우니까 시원하게 해준댔잖아. 조금만 참아."

그러고선 한 손에 들고 있던 컵에서 얼음 한 조각을 입에 넣고선, 밑에 깔린 제 입에 넣어주었다. 그의 타액이 섞인 투명한 얼음 조각이 제 입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투명한 액체가 그의 입에서 떨어져 제 볼으로 흘러내렸다. 얼음은 그의 입에 삼켜져 제 입으로 옮겨졌다. 부드럽게 녹아드는 얼음이 차가워야 할텐데, 그의 타액에 닿아 뜨겁다. 그의 시선마저도 정열적으로 타들어간다.

"하나, 더 줄까?"

그의 목소리는 낮게 제 귓가를 울린다. 억지스럽게 요구하는 말투는 아니었으나 분명 강압적인 부분이 있었다. 안 먹는다 해도 억지로 먹일 것이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얕게 웃으며 다시 컵의 얼음을 한 개 입에 머금었다. 얼음을 녹이는 그의 혀가, 어쩌면 야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잔뜩 머금은 얼음과 물을 제 입으로 넘겨주었다.

아니. 넘겨주다가 그의 입이 제 것을 삼킬 듯이 물고 놓아주지 않았다. 서로의 혀가 얽히면서 차가운 얼음을 물고 놓아주지 않았다. 말캉한 혀가 서로 부딪히며 얼음 조각을 녹혔다. 점차 작아지는 얼음 조각에 더 격하게 얽혀드는 혀가 뜨거웠다. 축축하게 얽혀드는 그의 혀가 부드럽게 제 혀를 감쌌다. 얼음이 다 녹고 나서도 그의 혀는 멈추지 않고 계속 입 안을 헤집었다. 이제 야하다 못해 노골적이다. 어느새 그에도 익숙해 졌는지 그의 노골적인 시선을 즐기고 있는 자신을 찾을 수 있었다. 부끄럽다기 보단,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그의 시선을 좇고 있다 보면 빤히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뜨겁게 일렁인다. 그 뜨거움을 즐기는 건 적적한 일상의 즐거움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하나, 더?"
"이번엔, 좀 더 진하게."

나는 그에게 옅은 미소를 흘겨보였다. 그는 제 눈꼬리를 손가락으로 살살 눌렀다. 그의 미소가 제 눈으로 흘러들어왔다. 점차 옅어지는 그의 미소가 제 눈에서 일렁였다. 그가 얼음을 물고 제 입을 향해 다가오자 나는 다시 한 번 조심스레 그의 입을 받아냈다. 서로의 혀는 얽혀서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부드러운 입 맞춤에 시원하긴 커녕 좀 더 더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그를 밀쳐낼 생각은 전혀 없다. 오히려, 그에게서 여름의 -잊지못할- 기억을 받은 것만 같다. 여전히 강렬하게 엉키는 혀가 나를 덮쳐온다.
얼음이 그의 손에 들려있던 컵에서 쏟아져 흘러내렸다. 제 몸으로 흘러내린 얼음이 뜨겁게 달아오른 맨 살에 닿아 투명하게 흘러내린다. 얼마 남지 않은 얼음이었기에 그는 제 팔에 떨어진 얼음을 혀로 감싸고, 제 팔을 핥아 올렸다. 아아, 그의 혀가 제 몸을 뜨겁게 감싼다. 그의 혀로, 여름을 새기며.


여름의 무더위는 얼음에 녹혀져 흩어졌다. 눅진한 기억 속, 그 해 여름을 꺼내며, 다시 한 번 여름을 새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