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피고,
 곧 당신은 질테니.
 밤의 마지막 야상곡을 들으며.



 다자이 오사무는 아름다운 선을 가진 남자였다. 근처 카페에서 가볍게 피아노 연주나 하는 음악가였음이 당연한데, 그의 선율은 지나칠 정도로 고상했다. 아니, 이질적일 정도로 가식적이었다. 무튼 내가 그를 처음 본 건, 확실히 그 카페에서였다. 투명한 창 밖으로는 꽃이 만발한 벚나무가 하나 있고, 비좁은 카페 안에 자리하고 있는 피아노 한 대와, 그 앞에 앉아서 피아노를 치는 다자이 오사무를 나는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가끔씩 카페에 나와서 피아노를 치곤 했다. 음악계에서 퇴출당한, 비운의 남자 다자이 오사무. 내가 그의 이름을 검색했을 때 나온 기사였다. 남자는 그 전에도 아름다운 미소로, 그 섬연한 손가락을 누르며 부드러운 연주를 이어나갔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인터넷을 뒤지던 도중, 과거 그의 리사이틀 영상이 있어 그것만 밤새 보고 있었다. 확실히 현재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카페에서 부드러운 연주를 하던 그는 온데간데 없고, 강하게 흘러내리는 피아노 음만이 주변을 가득 메웠다. 그의 음들은 하나같이 다 산만했다. 물론 그것 나름대로 아름다웠으나 지금과 같은 부드러운 선율을 과거 그의 연주에선 찾아볼 수 없었다. 그 화려함 속에 감춰진 남자의 선은 투박하고 거칠었다.

 과거 그러했던 그의 성정과 달리 제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남자의 모습은 꽤 부드러워 졌다고 느꼈으나 그 산만한 연주는 여전했다. 하지만 건반을 누르는 그 가는 손가락과, 심지어 연주를 끝낼 때 눈꼬리를 길게 휘며 웃는 건 남자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그는 제 그림에 영감이 되는 존재였다.

 하루는 그가 일하는 날에 맞추어 카페를 찾았다. 그는 여전히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꽃이 떨어지는 봄날에 잘 어울리는 선곡이었다. 다른 점원은 제 이름을 묻더니 컵에 '츄'라고 쓴 뒤 나중에 부르겠다 답했다. 카페에는 사람이 그닥 없었기에 나는 곧바로 커피를 받을 수 있었다.
 나는 그가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스케치 노트를 펴고, 연필을 집어들었다. 그의 모습을 피아노와 같이 그리기 시작했다. 마치 연속으로 사진을 찍어 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의 옆모습을 보고 있자면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음악가를 제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야 했다. 그는 이제껏 그래왔듯이 악보와 소통하고 피아노와 사랑을 해야했다. 그러면 내가 더 그의 아름다움에 집중할 수 있었을 텐데.
 남자의 눈꼬리가 휘었다. 곧 연주가 끝날 예정이었다.

 "오늘도 왔군."

 남자는 제게 다가오며 물었다. 나는 들고 있던 노트를 품 안에 감추며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이 이상 들켜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내가 그를 몰래 그리고 있었다는 사실만은, 그것만은 절대. 그러나 매정하게도 그는 여실히 떨고 있는 제 손에서 노트를 낚아채 갔다. 남자의 휜 눈이 놀란 듯 커졌다.

 "이거, 나인가? 나 같은 건 별로 좋은 모델도 아닐텐데. 굳이."
 "아, 아닙니다. 그냥 연주듣는 게 좋아서 듣다보니 손이 움직여서, 그렸,"

 말이 계속 헛나갔다. 남자는 당황한 제 모습을 보더니 다시 예의 그 사람 좋은 미소를 흘기며 노트를 돌려주었다. 나는 뻣뻣하게 그에게서 노트를 뺏어들었다. 남자는 당황하지 않고 제 귀에 무어라 속삭이더니 다시 피아노로 돌아가 앉았다. 나는 볼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창밖을 바라봐야 했다.
 그럼 계속 칠테니까, 열심히 그려. 이름이, 츄야랬나? 츄야 군, 이 음악은 널 위한 거야.

 남자의 아름다운 손이 계속해서 건반을 어지러이 건너다녔다. 음이 퉁명스럽게 제 가슴을 계속 찌른다. 붉어진 볼은 터질 것 같이 달아올랐다. 투명 유리 밖의 꽃잎은 선율에 맞춰 흩날렸다.

 "그래서, 츄야 군. 그 그림은 어쩔건가. 나한테 팔지 않겠나?"
 "싫, 습니다."
 "그래? 그거 아쉽군. 그럼 이건 어때. 이건 널 위한 곡이니까 그 그림이랑 이 악보를 바꾸지 않겠나?"

 Nocturne. 야상곡. 남자는 삐뚤어진 음표가 가득한 악보를 내게 내밀었다. 남자가 밤마다 썼을 이 곡을 생각하니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내가 가질만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단 하나 뿐일 거고, 더군다나 날 위한 곡이라는 말은 거짓으로 들렸기 때문일까. 이런 비슷한 곡을 그의 리사이틀 영상에서도 들은 것 같다.

 "그렇지만 이건, 제가 받을만한 게 아닌데,"
 "난 이미 그 악보를 다 외웠으니까, 상관없어. 그러니 자네가 가지게."

 그렇지만, 나는 끝끝내 손을 내밀 수 없었다. 남자가 악보를 건네는 손을 떨쳐냈다. 악보가 흰 꽃잎인 마냥 흩날렸다. 카페를 뛰쳐나왔다. 노트도, 가방도 챙기지 않은 채였다. 분홍빛의 벚꽃잎이 흩날렸다. 거리 곳곳의 화단에는 하얀 꽃들이 가득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음은 아직까지 겨울인 마냥 시리고 또 시렸다.


 그가 보여주는 관심은 거짓일 게 분명했다. 나를 위해 쓴 곡이라니, 가당치도 않을. 나는 그의 과거 리사이틀 영상이 담긴 DVD를 구입했고, 매번 그 부분만을 돌려보았다. 남자가 나를 위해 썼다던-분명 내가 아니라 전 애인을 위해 쓴-녹턴을 들으며 나는 애상에 잠겼다. 남자는 제게 관심을 보여주는 게 아니다. 나는 저 화면에서 보이는 남자를 알지 못한다. 저 무섭고도 강렬한, 그 잔인한 음들의 향연을 더 이상은 들을 수 없었다. 부드러운 음은 어느새 광기로 변해있었다.

 그 후, 나는 그의 음악을 끊었다.(흡사 마약과도 같은 중독성이었기에 끊었다는 표현이 적당할 것이다.) DVD는 부러트려 쓰레기통에 버렸고, 공책과 연필은 다시 샀다. 가방에도 그닥 중요할 만한 건 들어있지 않았기에 잊어버리기로 했다. 그리고 언젠가 예의 그 카페에 갔을 때, 그와 약 1년만의 조우가 이루어졌다. 남자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분명 나를 잊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고 커피를 주문해 옆 테이블에 앉으려는 순간, 그 강렬하게 아름다운 음이 제 귓가를 때렸다. 저 부드러움, 절제된 선율이 다시금 나를 매만졌다. 남자는 여전히 제 모습을 눈꼬리를 휘며 응시했다.

 기억하는걸까. 무례하게 그의 호의를 거부하고 도망친 나를. 남자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저 나를 향해 웃어보였다.

 꽃이 피고 있었다.
 그는 이제 유약한 성정을 과시했으며, 이전의 그를 나타냈던 화려한 그 자신은 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가 마지막으로 작곡한 녹턴을 들으며 그의 얼굴을 마주한다. 이토록 행복한 밤은 없으리라.


 꽃이 피고,
 곧 당신은 질테니.
 밤의 마지막 야상곡을 들으며.


Nocturne_fin.




 내 애인이었어.

 명명한 밤, 비가 축축하게 분위기를 감싸던, 그러나 마음만은 편안한 밤이었다. 괜히 밝았다는 이야기를 꺼내는 게 아니다. 우리는 격한 관계를 나누었고, 종장에는 제가 기절하듯 잠이 들었지만 제가 어지러운 잠에서 깨어났을 때(새벽 3시 쯤이었다),남자는 침대에 걸터 앉아 침대 옆 낮은 서랍장 위에 있던 액자를 보고 있었다.
 액자 옆에 있던 스탠드를 켜고, 그 빛이 새어나온 곳에 있던 여자의 모습은 흔히들 말하는 미인에 가까웠다. 한동안 만난 건 어둡고 칙칙한 아저씨들 밖에 없었지만, 분명 남자는 저 여자와 행복한 생활을 했으리라 짐작, 아니 확신했다.

 "좋아하는 사람이었어. 지금도 여전히 그렇고."
 "헤어…지셨어요?"
 "아니, 죽었어."
 "…."

 내가 못된 짓을 좀 많이 했거든. 남자는 조심스레 읊조렸다. 마음에 구름이 낀 듯한 느낌이었다. 남자는 소리없이 울었다. 나는 그를 뒤에서 껴안아 줄 수 밖에 없었다.

 남자는 여자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 놓기 시작했다. 한 귀로 들으면서도 다른 쪽으로는 말을 흘렸다. 주변을 둘러보자 그 여자의 흔적만이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녀의 사진이 한 쪽 벽을 전부 차지하고 있었고, 남자는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볼 때마다 행복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여자의 기억이 남아있는 방에 있어서는 안 될 이물질이 된 것 같았다.

 "그 사람은, 다자이 상을 좋아했…,"
 "아니, 날 싫어했지."

 싫다고 몸부림치는 여자를 범했어. 애인이라고 했지? 애인, 뭐 애인이라면 애인이었지, 몸만. 암튼 그녀에게 끔찍한 짓만 저질렀지. 그녀는 내 애를 가졌고, 마지막까지 나를 증오하면서, 자살했어.

 "……."
 "너랑 그 여자랑 닮았어."

 남자의 손이 제 몸에 다시 닿았다. 더러운 손이다. 남자의 손이 검게 물들고 있었다. 그 검은 손으로 제 몸마저 물들이고 있었다. 검게, 더 더럽게!

 "그래서 데려온 겁니까? 단지 그 여자랑 닮아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차마 남자의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다시 예의 그 날처럼 옷도 제대로 걸치지 못하고 그의 집을 뛰쳐나갔다. 살갗에 닿는 바람이 따가웠다. 눈물이 막 흘러댔다. 그의 집 앞에 주저앉아서 한동안 울었다.

 내가 속죄해야 할 나의 업일지도 모르지.

 남자는 낮게 읊조렸다. 그래, 당신이 속죄해야 할, 그 업. 하지만 부디 나를 다시금 당신의 업에 끌어들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당신의 기분에 움직이는 노리개가 아니니까.

 "…거기서 울고 있을 바에야 그냥 관심을 가져달라고 달라붙는게 더 빨랐을텐데."
 "그 여자는…,"
 "죽었다니까, 뭘 그리 걱정해."
 "그치만 아직도 사랑한다고 하셨…."
 "그럼 내가 널 왜 집에 데리고 왔겠어?"

 다자이 상 …! 나는 그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남자는 제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여자는 이미 제 머릿속에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냥 절 사랑하시면 돼요.
 밑질 거 없잖아요.
 분명 제가 더 사랑하는데.


 하지만 조금은 불안한 감정이 남아있는 아쿠타가와였다.


천유, 그 두번째 흔적(1)_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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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宰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노곤해 보이는 몸을 이끌고 걷기는 힘들 것 같아 그를 차에 태워 서에 도착했다. 자리에 앉아 턱을 괴고 멍하니 있던 아츠시가 저를 발견하고는 순순히 밖으로 나왔다. 아츠시 군은 제 뒤에 숨어있던 아쿠타가와를 보고선 의문을 내던졌다.
 
 "저기, 다자이 상? 그, 거기 그 사람은 누구…,"
 "걔."

 제대로 듣지 못했는지, 그는 의문형의 대답만 계속 내뱉었다.

 "네?"
 "집에 갇혀 있다던 그 민원신고의 주인공이다. 잘 돌보고 있어. 후쿠자와 상한테 갔다올테니."
 "네? 네…."

 조금 불안한 얼굴로 제 옷깃을 잡고있던 아쿠타가와의 손을 잠시 떼어놓고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서장실 앞에 서서 문을 가볍게 두드리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후쿠자와 상은 고양이를 매만지며 또 다른 사건을 검토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여간 저 노인네, 고양이 좋아하는 거 때문에 위층 공기가 너무 탁하다니까. 두어번 손을 휘휘 내젓고는 그를 향해 다가갔다.
 후쿠자와 상은 무슨일로 올라왔냐며 가늘게 눈을 뜨며 물었다.

 "알고 보낸겁니까."
 "뭐, 자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면 그래도 좋고."
 "그럼 이제 저 아이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
 "자네가 맡게."

 본부대로. 나는 별 말을 덧붙이지 않고 곧장 서장실에서 빠져나왔다. 밑으로 내려가자 그가 불안한 듯 의자에 앉아서 주위를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그런 그가 신경쓰이는지 아츠시 군은 진정시키려 했고, 쿠니키다는 그걸 보는 것 마저도 귀찮은지 아츠시 군에게 그만두라는 말도 없이 밖으로 나가버렸다.
 아쿠타가와에게 다가가자 그는 몸을 흠칫 떨면서도 공허한 눈은 유일하게 나를 응시했다. 가볍게 미소짓자 그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렸지만.

 "아, 참. 다자이 상. 아까 후쿠자와 상이 귤을 좀 사오셨던데, 드릴까요?"
 "몇 개만."

 아쿠타가와는 잠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아츠시 군에게서 귤을 받아들어 그에게 건네자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제 손을 떠밀었다. 턱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고, 제 손을 응시하며 입을 열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다시금 그 집에서의 그의 행태가 떠올라 나는 내밀었던 손을 거두었다. 귤을 싫어하는 건가. 그렇게만 짐작하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 그를 껴안았다. 그도 거부하지 않고 차분하게 숨을 내쉬며 안겼다.

 "아기고양이 같네요."
 "아기고양이라, 적절한 표현이군. 그렇지만 서내에서 애정행각은 삼가도록 해라, 다자이."

 쿠니키다가 담배를 피고 돌아오며 아츠시 군에게 뭐라 덧붙이고선 제게 시선을 향했다. 나는 못 들은 척, 시선을 피했다.
 아츠시 군이 멀리서 제게 물어왔다. 턱을 괸채로, 얼굴엔 불안함이 만연한 거짓미소를 띄운 채로.

 "그럼 어떻게 하실겁니까, 계속 그 집에 남겨두는 건…,"
 "걱정마. 내가 데리고 갈거니까."

 그러세요. 아츠시 군은 퉁명스레 대답하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새 긴장이 풀렸던 모양인지 아쿠타가와는 의자에 몸을 기대고 불편해 보이는 선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그를 바라보다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 남자들 같은 놈들한테는 안 보낼테니까 …, 근데 진짜 고양이 같네. 예민하고, 사람 경계하고…, 데리고 갈 수 밖에 없겠네."

 조금 걱정스런 다자이였다.



***



 "일어났나?"
 "여긴…어디,"
 "내 집. 넌 3일동안 잠이나 자고 있고,"
 "어머니는…,"
 "지금쯤이면 병원에서 이송했을 거야. 걱정하지마."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그럼 저는 이제…."
 "다시 간다고? 그 집에?"
 "그게 아니,"
 "여기서 살아. 그 놈들은 여기 못 찾으니까. 나중에 나랑 병원도 가야하고."
 "…네."

 이제는 영원한 봄이왔다. 더 이상 그를 괴롭힐 여지조차 남아있지 않은 까닭에 그의 마음은 결국 봄을 되찾았으리라. 한가지 두려운 점이 있다면 그건 필시 그가 나를 싫어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일 것이다. 나는 그와 소소한 애정을 나눌 생각이었다.

 나의 감정이 어느새 그에게 스며들었다. 봄은 쉬이 그를 반겼다. 나는 곧 그에게 있어 안기고픈 봄이 될 터였다.

 우리는 온 몸에 피어난 서로의 고독을 보듬고, 열을 나누면서 애정을 갈구할 것이다. 물론 먼저 다가서는 건 겨울이었다. 봄을 느껴보지 못한 소년에게, 봄을 느끼고픈 겨울이.

 겨울의 끝자락에서 봄을 마주 안았다. 서로는 서로의 모순된 감정조차 숨기지 못한 채로 더욱 애절하게 서로를 마주했다.

 겨울은 곧 지나가고, 봄에 완연히 물들 것이었다.



천유의 흔적_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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芥川



 죽음만이 내가 살 길이었다고, 나는 한참을 뇌까렸다. 차라리 그 때 맞아서라도 죽었어야 했다. 그랬다면 이런 상황까지 오지는 않았을텐데.


 어머니의 남친들은 전부 젊고 어린 남자들이었다. 남편을 일찍 보내고 마음을 기댈 수 있는 곳이 사라진 그녀는 나를 낳고 꼬박 10년 후, 매일 밤, 남자를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물론 나는 다른 방에서 잠을 자고 있었고, 5,6년 간은 잘 숨겨온 것 같았다. 문제는 어머니가 아닌 그 남자들이었다.
 남자들은 집으로 오면서 나를 눈독 들이고 있었던 건지 계속해서 내 방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눈치였다. 어머니는 나를 숨기는 데 급급했지만, 나는 한 번씩 몰래 잠을 자지 않고 문 뒤에 숨어 밖의 상황을 염탐하기도 했다. 그 당시 즈음이었다. 어머니가 피로에 젖어 기절하듯 잠이 들었던 날, 그 남자는 내 방으로 들어와서 나를 범했다. 다른 남자도, 또 다른 날에 온 남자도 다 내게 눈을 떼지 못했다. 비로소 나는 악귀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게 내 나이 16살의 경험이었다. 2년이 지난 지금에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들과의 관계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역겨운, 어머니의 남친들과의 관계.


 반항해 봤자 돌아오는 건 손찌검 밖에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반항하지 않고 가만히 당하기만 했다. 아니, 이제 익숙해 졌으니 당하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 어머니도 남자들과 내가 관계를 가진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남자와의 흔적은 날이 갈 수록 눈에 띄게 늘어났다. 어머니는 못본체 했고, 나 또한 감출 생각 조차 하지 않았다.

 아파트에서 나와 주택으로 이사를 했다. 단칸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들은 나를 찾았다. 어머니는 그 꼴이 보기 싫으셨는지 항상 밖에 나가계셨다. 나는 다시 그 지겨운 생활을 반복해야 했다. 

 하루는 새벽에 잠이 깼다. 소리를 세게 지른 듯 목이 쉬어있었다. 어머니는 아무일도 아니었다고 하지만 결코 그런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어떤 날은 밖으로 나가자 옆집 사는 사람이 날 보며 다짜고짜 화를 냈다. 밤마다 시끄러워서 잘 수가 없다는 둥, 소리 좀 줄이라는 둥, 알 수 없는 얘기를 지껄였다. 무시하기로 했다.


 그로 부터 2주 후에 한 남자가 집으로 쳐들어왔다. 어머니의 남자는 아니었다. 그는 민원신고가 들어와서 이 집을 찾았다고 했다. 나는 남자에게서 시선을 피했다. 내 몸을 바라보는 그 두 눈이 역겨웠다. 남자는 다시 오겠다는 말을 지껄이며 돌아갔다.






太宰



 그대로 서를 나와 다시 그 집으로 돌아가던 도중이었다. 계속해서 그 소년의 여린 살결이 시야를 가렸다. 소년의 몸은 안타까울 만큼 말라있어서 그 몸에 닿은 것 조차도 죄가 될 것만 같았다.
 밤 중에 그곳에 다다랐을 때는 고요한 분위기가 내려앉은 후였다.
 소음에 대한 확인을 명목으로 내세워 그 집에 가는 도중이었다. 이따금씩 멀리 떨어진 집에서 아기 울음 소리가 들리기도 했고, 담벼락 위에서 도도하게 걷던 검은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귓가를 간지르기도 했으나 '그 집'에서는 의심스런 정적만이 가득했다. 기어코 무언의 확답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 나는 계속 그 집앞에서 서있었다.
 순간, 집 안에서 비명소리가 터졌다. 여자의 높은 톤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묵직한 남자 목소리가 난 것도 아니었다. 그 애의 비명이었다. 현관문을 탕탕 두드려 보았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그 소년의 비명 뿐이었다.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 점차 비명소리는 약한 신음소리로 변질되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 확인을 해보고 싶었는데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옆 마당쪽에 작은 창문이 열려있었다. 조용한 비명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그만, 그만 둬! 싫어, 아프단말야,하지 …마,"
 "아가, 아가, 진정해. 아가…,"

 여자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곧이어 여자도 약간 혼미한 정신으로 소년을 떼어내려고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렸다. 저리가, 넌 악귀가 붙은게야, 이 빌어먹을 놈! 여자의 손이 소년을 내리쳤다. 여자는 꼴보기도 싫다는 듯 짐을 싸서 집을 나갔다. 허망하게 남겨진 소년을 뒤로한 채, 문은 열려서 끼익대는 소음을 내고, 여자는 전화를 들고 남자를 찾고 있었다.
 몰래 빠져나가려던 참이었다. 젖혀 있는 현관 문 사이로 그의 눈이 다시 한 번 더 나를 응시해오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 차가운 두 눈을 의식적으로 피하며 도망치듯 뛰쳐나왔다.

 그 다음 날, 다시 그 집을 찾았을 때 소년은 자고 있던 도중이었다. 밤새 아무도 다녀가지 않았는지 문짝은 닫혀있지 않고 열려있었다.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섰다. 소년은 몸을 웅크려 뒤척이고 있었으며, 나쁜 꿈을 꾸는지 얼굴은 찌푸린 채였다. 나는 앉아서 그가 깨기만을 기다렸다.

 한 서너시간 쯤 지났을까. 오후가 되어서야 눈을 뜬 그는 가픈 숨을 내쉬고 있었다. 뭔가에 쫓기는 꿈이라도 꾼건지 사방을 둘러보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는 사무라치게 놀라며 조금씩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문이 열려 있었어. 너 잡으러 온 거 아니니까 걱정마."
 " ……."

 그의 목부근에 어제의 그 흔적보다 더 선명한 자국이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이질적인 흔적이었다. 집 안에만 있었다면 저런 상처가 날 일이 없을텐데. 혹여 벌레에 물린 건가 싶었는데 그러기엔 흔적이 너무 많았다. 목부근의 혈흔과 같은 자국을 확인하려 다가서려 하자 그는 손을 막 내저으며 이상한 소리를 냈다.

 "잠깐만, 그 목에 다친 건…,"
 "하, 하지…마, 하지…마세요. 싫어! 싫어! 하지마!"

 발악과도 같은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소년의 가녀린 몸이 사시나무 떨듯 부서지고 있었다. 제가 다시 한 번 그에게로 다가가려 하자 그는 제 눈길을 피하며 계속 손만 휘휘 내저었다. 그러자 어느 순간 그의 손목이 붙잡혔다.

 "괜찮아, 떨지마. 아무 일도 없을거야. 괜찮아."
 "으…읏,"
 "괜찮아. 아무 짓도 안할게."

 그는 그제서야 긴장을 서서히 풀며 숨을 고르게 내쉬었다. 그러나 여전히 저를 경계하고 있었다. 마주앉아 그의 등을 쓰다듬자 그도 어느정도 편해진 표정으로 느릿하게 시선을 마주했다.

 "잠깐만, 잠깐 위의 옷 좀 벗어 볼래?"
 "으, 으아으으,"

 경기를 일으킬 것만 같은 비명소리를 지를 준비를 하며 다시 그는 몸을 감쌌다. 이렇게 까지 온 상황에서 포기할 순 없었다.

 "잠깐만, 잠깐이면 되니까,"
 "싫어! 그만…, 만지지,"

 말란 말야…. 조심스럽게 잡고있던 그의 상의를 벗겨내자 그는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쏘아보며 몸을 웅크렸다. 등에는 온갖 시퍼런 멍들이 가득 피어있었다.

 "가관이네."

 나는 툭 내뱉었다. 그러자 그는 더 몸을 웅크렸다. 아아, 실수한 건가. 나는 그의 몸에서 나는 이질적인 향기를 느끼려 했다. 순간의 정적으로 깨졌을 그 묘한 향은 어미란 여자가 쓸 법한 향수도 아니었을 뿐더러 산뜻한 꽃향기는 더더욱 아니었다. 제 기억의 흔적을 쫓아갔을 때, 그 이질적이고 묘했던 텁텁한 향의 출처는 분명 남자의 그것이었다.
 방 안을 가득 채운 텁텁한 향도 그 향이었다. 밤꽃 냄새는 희미하게 후각을 자극했고, 그는 여전히 떨면서 벽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붉은 흔적이 목덜미에 낭자했고, 푸른 꽃이 등줄기에 가득했으며, 허옇게 들러붙은 정액은 그 모든 흔적을 증명하 듯 소년의 몸을 녹이고 있었다.
 나는 떨고 있던 그를 뒤로하고 화장실로 가서 욕조에 물을 채웠다. 적당히 따뜻한 물이 채워졌을 즈음 나는 그를 안아들고 욕조로 향했다. 그는 제 손길을 거부하며 벌벌 떨다가 가볍게 들려진 자신의 몸이 붕 떠있음을 느끼자 당황한 모양인지 더 이상 화내지도 못하고 가만히 제 품에 안겨있었다.
 제 목에 손을 두르고 떨고 있던 그를 욕조안에 가볍게 내려놓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안쓰러워 보이는 몰골이었다. 깡마른 몸하며, 푸석해진 머릿결에, 온 몸에 가득 퍼져있는 시퍼런 멍. 그리고 목덜미를 뒤덮은 붉은 울혈까지. 무게마저도 이게 사람이 맞는지 싶을 정도로 심하게 가벼웠다. 얼굴은 병이 있는 환자인 마냥 시퍼렇게 질린 그를 진정시키려 어깨를 쓸어내렸다.

 "……."
 "아무 짓도 안해. 넘겨 짚지 마. 이런 연약한 몸뚱아리엔 관심도 없다. 너 안는 새끼들 처럼 파렴치한은 아니라고."

 그러니까 힘 좀 풀고 가만히 있어. 나는 조곤조곤 속삭였다. 노곤한 몸이 점차 물 안으로 가라 앉고 있었다. 샤워기 헤드를 그의 머리에 가져다 대자 그는 사무라치게 놀라며 싫다고 패악을 부렸다. 가슴께로 튄 물이 짐짓 제 표정을 사납게 만들었다. 하지만 다시금 그의 난기를 진정시키려 웃는 시늉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옳지, 착하지. 가만히 있어."
 "거짓말 마세요. 그 남자들도 다 이런식으로…,"
 "거짓말 아냐. 진짜 이것만 하고 아무 짓도 안 할게."

 그러자 좀 누그러진 표정으로 몸을 웅크리며 물을 맞고 있는 그를 보다가 화장실 바닥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샴푸를 집어 들었다. 적당량의 샴푸를 덜어내서 그의 머리를 감겨주었다. 점차 불어나는 거품의 감촉이 그리 싫진 않은지 제 손에 머리를 기대면서도 거부하지 않는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아쿠타가와 군."

 이름을 부르자 흠칫 놀라며 의뭉스런 표정으로 저를 처다보는 탓에 쥐고 있던 샤워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그제야 제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을 제대로 인지하고선, 다시 말을 이었다.

 "그게…찾아보려던 건 아니었고, 도움을 주려면 어느 정도의 정보는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도 없어서…,"
 "……."
 "역시 아쿠타가와 군보다는, 류노스케라 불러야 하나?"

 그러자 얼굴이 붉어지며 벽으로 다시 고개를 돌리는 아쿠타가와를 보며 가볍게 웃어보였다. 그는 지겹다는 듯 제게서 샤워기를 빼앗아서 머리에 묻은 거품을 씻어냈다. 그러나 깨끗하게 씻기진 않았는지 군데군데 거품이 머릿결 사이에 피어있었다.

 "머리에 거품 있어. 가만히 있어봐."
 "……."
 "어쩌다가 이렇게 된거야."

 제가 그의 등을 조심히 매만지며 묻자 그는 몸을 떨며 시선을 피했다. 추측은 하고 있었지만 확실한 물증이 필요했다. 그게 이 애의 발언이든지 몸이든지 간에.

 "말하기 싫으면 말 안해도 돼. 그렇지만 널 여기서 빼내려면, 협조는 해야지?"
 "…간,"

 결국 그는 입을 여는 걸 택했다. 무어라 중얼거리는 지 제대로 들리지 않아 먹먹한 귀만 매만지며 다시 물었다. 그러자 그는 입술을 깨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강…간, 그게 그러니까,"
 "강간당한건 알고있어. 누가 그랬는데."
 "아저씨들 …,어머니의…남자들이,"
 "알겠어. 그만 떨어."

 나는 그를 진정시키고는 마저 씻지 않은 몸에 거품을 낸 비누를 천천히 문질렀다. 벌어진 상처가 따가웠는지 그는 아,아 하고 신음을 내뱉다가도 어느 순간엔 익숙해져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나는 다시금 그의 가녀린 몸을 보며 감탄을 자아낼 수 밖에 없었다. 그건 놀라움의 표시라기 보단 안타까움의 탄식이었다. 뼈밖에 보이지 않는 마른 몸에 남아있던 남자들의 흔적을 벅벅 긁어냈다. 그는 비로소 악귀를 쫓아낸 듯 했다.

 "…경찰서 가자."
 "……."
 "너 도와주실 분이 많이 계실거야. 좋은 데로 보내줄게. 그, 돈 많은 변태 노인네는 제외하고…, 좋은 가족 찾아보면 아마 널 받아 줄만한 곳도,"

 그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순간 당황하여 그를 큰 수건으로 감싸며 도닥였다. 그는 금새 울음을 그치고 안정을 되찾았다. 왠지 제가 데리고 있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고양이 같은 느낌이니까 후쿠자와 상이 좋아하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잠시 들었지만, 어쩌면 후쿠자와 상도 변태 노인네일 수도 있었기에 고민을 지체없이 접었다.

 "알았어, 알았어. 안 보내면 되잖아."
 "어머니는, 어떻게…,"
 "조만간 병원에서 나올거야. 거기 가면 의사 선생님하고 간호사 선생님들이 잘 돌봐 주실테니까 걱정할 필욘 없어."
 "……."

 그리곤 덧붙였다.

 "넌 나랑 가자."

 조금 싸늘해 보이는 표정이 노골적으로 드러났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그를 챙겨입혀 제 차-정확히 하자면 경찰차-에 태워서 서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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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宰


 꿈이었다. 꿈 속은 검은 물로 가득 차있었다. 나는 그 위를 걷고 있었다. 신발도 신고 있지 않았다. 맨발로 물 위를 걷는 기분이란, 실로 미묘한 것이어서 발바닥에 닿는 그 느낌마저도 이상했다.
 꼭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 청아한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진동해 제 귓가를 울리는 것과 동시에 먹먹한 정적만이 그 공간을 끊임없이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모든 고요가 내 귓가에 잠식했을 때야 나는 두려움을 감지할 수 있었다.
 내 발목을 휘어잡는 그 창백한 손은 발길질 한 번만으로 꺾일 것만 같이 섬약하게 보였다. 귀는 이미 먹먹해져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나, 끊임없이 아까의 그 잔청이 계속 울려댄다.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하고.
 푹꺼진 어둠의 심연에 허우적대던 그 하얀 손을 잡아올린 건, 얄팍한 동정심 때문이 아니었다. 그래, 미묘하지만 물 속에서 허우적대는 형체가 보인 것 같기도 하다. 그 부서질 듯한 연약한 손목을 잡아서 끌어올렸다. 그-사실 그라고 명명하기에는 너무 예쁘장한 여자아이 같은 모습이었던 남자아이-가 물에서 끌려나오던 순간, 눈을 떠버렸다. 허망한 꿈이 스치듯 사라졌다. 언뜻 기억나기에 어두컴컴한 곳이었던 건 기억나는 데, 그 이후는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머리가 백지처럼 하얘졌다.

 쿠니키다는 제가 가픈 숨을 내쉬는 걸 보더니 한숨을 푹 쉬면서 제게 다가왔다. 숙직실 소파에 기대 누워있던 나는 꿈을 떠올리다 말고 숨을 고르느라 바빴다. 그는 제 몰골을 보더니 그러려니 하며 가지고 있던 하얀 종이를 제게 건냈다.
 나는 그에게서 종이를 받아들고 머리를 대충 정리한 뒤 숙직실을 나섰다.  그도 나를 따라오며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이게 뭔데?"
 "거기 적힌 그대로."

 모르겠다는 둥 의아한 얼굴로 되묻자 쿠니키다는 제게 퉁명스레 답했다.

 "그래서, 내가 이걸 맡으란 말야?"
 "어쩔 수 없잖아. 상부에서 지시 내려온 거고. 너 같이 머리 텅빈 놈은 가서 따질 수라도 있지만, 내가 뭐라 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잖 …, 어이! 다자이!"

 쿠니키다가 뒤에서 무어라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으나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나는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은, 그가 건넨 그 종이를 접어 코트 안주머니에 쑤셔넣고는 뒤를 돌아 쿠니키다를 바라보았다.

 "미안, 나 지금부터 자살하러 갈꺼니까, 알아서 잘 부탁하네!"

 그러고는 뛰쳐나가는 제 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뭐 씹은 표정으로 방황하며 돌아다니는 그가 꽤 재미있어보여 나가기로 한 건 잠시 미루고 구석에 숨어있었다. 아까부터 계속 내 주변을 쫓아다니던 아츠시가 쿠니키다에게로 다가갔다. 아무래도 아까 했던 말들을 다 들었던 게 아닌가 싶다. 어둠이 짙게 드리운 쿠니키다의 뒤에서 아츠시가 말을 건냈다.

 "저러고도 어떻게 자살예방 캠페인 프로젝트를 맡으셨대요? 학교에선 저런 인간을 받아준답니까?"
 "저 놈이 가겠다고 한 게 아니라, 학교에서 하도 사정해대서 받아준 거랜다. 그 알량한 말솜씨로 애들한테 이상한 말이나 지껄이다 올걸."
 "그래도 조금 …."
 "상관없어. 일 내면 자기가 알아서 수습할 테고, 적당히 저 잘난 얼굴이나 보여주다 돌아오겠지. 걱정말고 순찰 준비나 해. 아, 그거 네가 맡을래?"
 "하기 싫다고 후배한테 막 돌리지 마세요. 상부에선 다자이 상한테 지시한 거라면서요. 굳이 또 제가 맡았다가 후쿠자와 상에게 한 소리 듣긴 싫습니다."
 " …뭐, 하기 싫음 말고. 빨리 챙기기나 해."
 "예."

 지극히 그들다운 대화였고, 그 특이점 하나 없는 평범란 말들에 지겨워졌기에 일어서려던 찰나, 아츠시 군이 저를 쳐다보며 안쓰러운 눈빛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그 이상의 호의는 보이지 않았다.

 "다자이 상."
 "무슨 일이라도?"

 어색하게 웃어보이는 제 모습을 보더니 못미더운 얼굴로 제 이름을 부르는 바람에 나는 구부정하게 화분 뒤에 숨겼던 몸을 세웠다. 아츠시 군은 걱정스럽단 얼굴로 다시 한 번 제게 물어보았다.

 "그거, 정말 하실겁니까."
 "위에서 내려온거라고. 거절할 수 있을리가 없잖아. 정부의 개라고 불리는 놈인데 이런 거 하나 못 할까. 자고로 충성스런 개한테 내려지는 달콤한 보상은 상상하는 그 이상이란 말이지, 아츠시 군."
 "준다해도 필요없습니다."
 "그래? 그럼 내가 다녀오겠네. 자살예방교육은 자네에게 맡기지."

 코트 주머니에서 그 하얀 종이를 꺼내들고 흔들거리자 아츠시 군의 표정은 점차 어두워졌다.

 "난 여기 다녀올테니, 학교가는 건 쿠니키다 군에게 잘 말해서 자네가 갔다오고."
 "그건,"
 "괜찮네, 학교에서도 별 신경 쓰지 않을 걸세. 그럼, 부탁하네."

 허망한 표정으로 제 얼굴를 지긋이 바라보던 아츠시를 뒤로하고 서를 빠져나왔다. 하여간 그 꼰대. 무슨 일이든 나한테 맡기지 않으면 좀이 쑤시나 보지. 나는 종이를 다시 펼쳐들었다. 바람에 펄럭이던 종이 안에서 붓으로 쓰인 정갈한 글씨체가 흔들렸다. 대체 요즘 시대에 사내 유선 전화로 통보해도 될 걸 왜 굳이 종이에 서써 전보를 보내냐 이거지.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글자를 읽어내렸다.


「다자이 군, 여기에 좀 다녀오게나. 위치는 밑에 사진으로도 찾을 수 있을게야. 자네가 가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래. 밤마다 비명소리가 들린다는데, 말 좀 잘해보게. 민원신고가 끊이질 않아.」


 민원신고, 라니. 고작 민원신고 때문에 내가 가야하는 건가. 그런거라면 굳이 내가 아니라도 나카지마 군이나 타니자키 군에게 맡겨도 상관 없었을 텐데. 내가 가지 않으면 해결하지 못할 일이란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확신할 수 없었으나, 결코 좋은 느낌은 들지 않았다. 혹여 성도착증 환자라든가, 정신나간 미친 놈이 날뛰고 있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사진 밑에는 작은 글씨로 무언가가 쓰여져 있었다.

 
「서에서 나와 직진하다보면 공터가 하나 나올텐데, 멈추지 말고 쭉 걷게나. 그러다보면 집들이 드문드문 거리가 멀어질 거야. 그러다 마지막에 허름한 집이 하나 있을거야, 빨간 우체통이 있는.」


 사진을 보며 찾다보니 어느새 시야에 빨간 우체통이 보일만큼의 거리에 다다랐다. 하지만 서에서 그렇게 먼 것 같지는 않았다. 나를 힐끔거리던 동네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쓰였다. 자기네들이 민원 넣어놓고 이리 내빼도 되는 건가. 이 궂은 일을 계속 도맡아온 타니자키 군이 정말 대단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저 집에 사는 사람에 대한 약간의 정보라도 얻으려 말을 걸어보려 했으나 다들 제 몰골을 보곤 자리를 피하거나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고개를 돌리기 일쑤였다. 별 수없이 그냥 집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뒤에서 한 여성이 제 코트를 잡아 끌었다.

 "어디서 오신 분인지는 모르겠지만 거긴 들어가지 말아요. 악마가 사는 곳이야, 거긴. 거기 들어가면 살아나오지 못해요."
 "경찰입니다."

 경찰증을 꺼내 보여주자 덜덜 떨던 여자의 등이 조금이나마 진정된 듯해 보였다. 

 "민원신고 받고 왔습니다. 저기 사는 사람에 대해 뭔가 아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아니요, 아니에요. 아무것도 모릅니다. 저기 사는 괴물은, 그건…."

 주저앉아 이상한 언어를 쏟아내던 여인을 진정시킨 후에야 나는 그 집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문이 닫혀 있는 것 같았지만 다행히 열려있었다.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열리는 현관문을 조심히 열어 젖히고선, 미세하게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어두운 그 집에 발을 내디뎠다. 어디서 본 것만 같은 곳이었다. 마치 그 꿈 속에서의 어둠과 같은 ….

 "누구 있으십니까? 이웃에서 민원 신고를 넣으셔서 부득이 하게 들어왔습니다만…,"

 손을 더듬어 벽에 있던 스위치를 누르자 천장에서 불이 깜박거리며 희미하게 자취를 남겼다. 빛의 잔상이 어린 그 단칸방에 있던 건 다름 아닌 소년이었다. 그것도 아주 앳된, 어린 소년.
 몸을 감싸 방구석에 구부정하게 앉아있는 그 모습은 한눈에 보기에도 안쓰러워 보였다. 툭 튀어나온 뼈마디마디가 고통스러워 보였으며, 한 몇 달은 굶은 듯한 얼굴에 핏기조차 없어 창백해 보이기까지 했다. 또, 그 새에 인기척을 느끼고는 느릿하게 나를 바라보는 그 눈빛마저도 흐릿했다. 삶의 의미를 잃은, 곧 죽을 때를 앞둔 노인네처럼 그의 눈에는 공허만이 가득했다.

 "부모님은…어디 계셔?"
 " … …."
 "여기 집에서 밤마다 소음이 너무 심하다고 민원이 들어왔는데, 혹시 부모님이 밤마다 싸우고 그러시니?"
 " … …."

 소년은 나를 응시하다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돌리고선, 벽을 마주보고 앉았다. 빨리 나가달란 의미였을까. 나는 눈을 한 번 치켜뜨고는, 그 가냘픈 뒷모습과 섬약해 보이는 목덜미에 초점을 맞추었다. 혈흔인지 모를 붉은 반점이 낭자하게 목덜미에 울긋불긋 나있었다. 한편으론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으나 상처가 난거라 단정짓고는 그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시키려 집을 나서는 도중, 현관에서 몸을 뒤돌던 찰나 그와 눈이 마주쳤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눈이었다. 조금씩 생기가 돌아오며 예의 어떤 광명을 찾은 듯했다. 그 애절한 눈빛은 마치 자신을 여기서 꺼내달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 이 지독하고 차가운 감옥에서.

 "나중에 다시 올게."

 소년은 아직까지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문이 닫히는 순간에는 어떠했을지 몰라도, 적어도 그 틈새로 보이던 그 표정은 두려움과 맞먹는 것이었다. 적어도 이름 정도는 물어 볼 걸 그랬다. 다음을 기약하고 다시 서로 돌아가려던 찰나 이번엔 아까와는 다른 여자가 제 앞에 마주섰다.

 "들어갔다가 뭔 일 없었죠?
 "예? 어, 예, 아무일도."
 "저기 저 여편네가 그 애 생모인데, 2년 전부터였나? 저렇게 미친듯이 집에 안 들어가려고 발악을 한다고. 괴물이 있다는데 집에 들어가려 하면 저 여자가 막아서니까 신경을 안쓸래야 그럴 수가 있나."

 그녀가 손으로 가리키는 곳에 아까 그 여자가 또 다른 사람을 붙잡고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쯔쯧, 여자가 미친게야. 악귀에 씌인거지. 하루는 남편이랑 몰래 저 집에 들어가 봤는데 애가 하나 있데? 그런데 애 상태가 이상했어. 막 뭐에 홀린 듯 떨고있긴 한데, 애 몸에 상처가 막 나있는 거야. 경찰에 신고하려고 하니까 애가 말리기에 그만, 이제까지 말 못하다가 최근에 들어서 밤마다 저 집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길래 신고했지."
 "잘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는 김에 저 여자도 어떻게 할 수 없나? 낮만 되면 집 안에 귀신이 있다느니 그러면서 밤만 되면 조심스레 슬금슬금 집으로 들어가는데 낮마다 행패를 부리는 걸 어찌 가만 두고 볼 수가 있나. 어디 정신병원에라도 보내야 하는 거 아닌가?"
 "잘, 잘 얘기해 보겠습니다."

 소년의 어머니라는 여자에게 다가갔을 때, 그녀의 눈빛이 나에게 닿는 그 순간순간의 찰나가 바람처럼 스쳐 지나갔다. 여자는 소년과 같은 모습으로 나를 외면했다. 경찰이라고 소개한 제 시선을 피하고, 마치 자신이 무언의 죄를 지은 죄인인 마냥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급기야 내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려 가까이 다가갔을 적 마저도 손을 내저었다.

 "부인, 말씀을 좀,"
 "난 할말 없습니다. 쟤는 악귀에 씌인거라고, 것도 남자 홀려먹는 악귀! 대체, 대체 왜…."
 "부인, 일단 진정하시고 제 말 좀,"
 "난 잘못한거 없다고! 그건 악귀 때문이야. 불쌍한 내 새끼 몸에 더러운 잡귀가 들어가서…, 그래서…."

 흐느껴 우는 여자에게 더이상 말을 걸 수가 없었기에 그냥 서로 발걸음을 옮겼다. 꽤 많이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발걸음이 무거워서 그런지 서로 가는 데에도 꽤 긴 시간이 걸렸다.
 곧장 서에 도착해서 그들 모자의 신상을 찾아보았다. 어머니인 여자는 쉽게 눈에 띄었다. 그러는 반면에 그 아이는 찾기가 힘들었으나 몇 번의 추적 끝에 그의 신상을 찾아냈다. 사진도 없고 다른 정보조차 불분명 한걸 보면 미성년자인 듯 했다. 18살, 이제 곧 성인이 될 나이였다. 순간 그 소년의 유약한 몸이 떠올랐다. 부러질 것만 같은, 고작 14살 정도 되어보이는 그 마른 몸이 이제 성인이 될 청년의 몸이란 게 놀랍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보단 걱정이 앞섰다. 슬슬 여자의 말이 정신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그 애는 악귀가 씌인거야, 것도 남자 홀려먹는 악귀 …! 그러니까 가까이 다가가지 마. 무언의 경고와도 같은 압박이 가슴을 억죄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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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델 리에프×일일 스타일리스트 야쿠



 "애인이 챙겨주셔서 좋으시겠어요."
 "네, 이게 다 애인 잘 둔 덕이죠."
 "오늘도 다른 여자모델과 촬영하면 여자친구가 섭섭해 하겠는데요? 괜찮으시겠어요?"
 "아아, 부끄러운데여. 제 애인은 별로 상관 안 쓸거에여. 저는 단 한 번도 그 사람한테서 눈을 뗀적이 없거든요. 지금도."

 그러고선 지긋이 벽뒤에 몸을 숨긴 제 모습을 바라보는 리에프를 찡그리는 눈으로 그만하라고 제지하고선, 그대로 의상실로 도망치듯 들어갔다. 붉어진 볼을 붙잡고, 어쩔줄 몰라하는 모습이 꽤나 귀여웠다. 리에프는 야쿠를 보며 미소짓고선,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곧 있으면 화보 촬영이 있을 예정이었다. 아직까지도 세간에 알려진 열애설은, 일반인과 연애하는 모델 리에프였으나 사실은 달랐다. 자신의 여자친구는 남자였고, 그렇다고 야쿠가 제 스타일리스트인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항상 제 촬영장을 쫓아다니며 날 바라보는 야쿠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발갛게 달아오른 볼을 한 번쯤 꼬집어 주고싶을 정도였다. 원래라면 누나가 왔어야 할 촬영장이었으나 오늘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누님대신 야쿠상이 온 것이다. 야쿠는 오늘 일일 스타일리스트로 제 의상을 체크해 줘야할텐데. 의상실로 들어가자 주저 앉아선 벌겋게 달아오른 야쿠상이 있었다.
 야쿠에게로 다가가자 얼굴을 가리고선 가까이 오지말라는 야쿠의 말을 무시하고선, 그에게로 다가섰다. 야쿠 상을 일으켜 세우자 그는 달아오른 얼굴을 그 작은 손으로 가리고선, 제 품으로 파고드는 그가 귀여워서 한 번 안아주었더니 더 볼을 붉힌다. 암튼 귀여워, 정말.

 "야쿠상. 고개 들어봐요."
 "응."
 "여기 봐. 완전 빨게졌네. 그렇게 부끄러워요?"
 "일단 옷 골라줄게 가만히 있어봐."

 야쿠는 볼을 계속 매만지며 제 옷을 고르고 있었다. 옷을 꺼내고 건네주는 손길이 부드러웠다. 나는 그에게서 옷을 받아들고선, 옆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클래식 정장컨셉으로 웨딩컨셉 화보였는데, 굳이 보자고 하면 조금의 관능미를 더한 웨딩컨셉 화보랄까. 여기서 중요한 건, 웨딩 '컨셉' 화보였다. 절대 그 상대 모델과 하는 웨딩 화보가 아니었다. 나도 사진 감독님만 아니었다면 야쿠상이랑 진짜 웨딩사진이라도 찍었겠지. 둘이서. 하지만 이건 일이었고, 내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그저 열심히 하겠다는 말 뿐이었다. 다른 건, 생각치도 못했다.

 "나 촬영하고 올 동안, 가만히 있어여."
 "걱정마. 내가 너냐."
 "열심히 하고 올게여."

 야쿠 상을 뒤로 하고, 상대 모델과 함께 호흡을 맞추고서 촬영시간이 거의 2시간 정도가 흘러있었다. 조금 쉬어도 괜찮다는 사진감독님의 말에 의상실로 돌아가니 야쿠상이 곤히 자고 있었다. 내 애인은 어찌 저리 귀여운지, 보고만 있어도 입꼬리가 올라갈 지경이었다. 곤히 자고 있는 야쿠의 머리결을 쓰다듬자 눈을 비비며 야쿠가 일어났다. 아, 깨우려던건 아니었는데. 미안함에 야쿠상의 얼굴을 매만져 주니 좋다면서 계속 비비적 거리며 제 품으로 파고드는 야쿠상을 제 무릎에 앉혔다. 아직까지 잠이 덜깬 야쿠상이 꾸벅거린다. 나는 졸린 야쿠상의 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선 좀 더 쉬라고 이른 뒤 옷을 갈아입고 다시 촬영장으로 나갔다. 이미 야쿠가 의상을 골라놓은 뒤였기에 쉽게 입을 수 있었다. 아마 그가 없었다면 오늘도 또 매치가 안 맞는 옷을 입고나가 감독에게 안 좋은 시선을 받을 뻔했다. 하지만 오늘은 야쿠상이 있었기에 그런 일은 면했다.

 그 후 여러번의 촬영 뒤, 의상실로 들어서자 두 눈을 껌벅이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야쿠상이 보였다. 나는 그를 두 팔로 안고선, 달콤하게 속삭였다. 야쿠상도 싫지는 않았는지 고개를 흔들면서도 계속 품으로 파고들었다. 비로소 그가 팔을 벌려 제 품에 완전히 파고 들었을 때, 나는 그를 안아 올려 의상실 밖으로 나갔다. 촬영장 안에서는 이미 촬영이 다 끝났으므로 양해를 구하고 스튜디오를 잠시 쓰겠다고 이른 뒤, 야쿠상에게도 옷을 입혀주었다. 둘다 정장을 입고 있으니 진짜 웨딩화보 같기도 하고, 프로포즈하고 싶은 느낌도 들었다.

 나는 야쿠를 안아들며 말했다. 야쿠상, 좋아해요. 이런거 밖에 못해주는 나라도, 사랑해 주실래요? 감독님은 가볍게 몇 번 셔터를 누르시더니 싱긋 웃어보였다. 야쿠는 촬영 중이란 것도 인식하지 못한채로 리에프의 품에 파고들며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둘은 가볍게 버드키스를 나누었다. 둘의 달콤한 장면을 놓지지 않겠다는 감독의 열혈한 의지로 서로는 정답게 사랑을 나누었다. 둘의 밀어는 사진감독에게 들리지 않았지만, 나중에 사진을 보고 나서 놀라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던 야쿠였다. 야쿠는 리에프를 안으며 말했다. 부끄럽지만, 그래도. 난 너 많이 좋아해.

 "사랑해, 리에프."
 "저도, 저도 그래여."

 둘의 밀어는 끊임없이 이어지다가 서로의 입에 결국 먹혔으나 다시 흩어진 밀어가 서로의 귓가를 자극하기 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둘은 계속해서 사랑을 속삭였다. 마치 정말 신혼인 것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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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오해는 금물

 

 

 

 오이카와는 뺨 끝에 남은 마츠카와의 진득했던 눈길을 곱씹으며 방송국까지 걸음을 옮겼다. 붉게 물든 왼쪽 뺨 언저리에는 마츠카와의 흔적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손끝이 주는 감각에 오이카와는 약간의 온기를 느꼈으나 찬바람에 이내 그 감각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마츠카와의 시린 웃음이 눈앞을 가렸다. 처진 눈 아래로 떨어지던 그의 잔해가 바닥을 뒤덮고선, 오이카와는 그 잔해 위에서 유영하던 한 마리 물고기였다. 펄떡이던 그의 숨소리를 들은 적이 있던가. 마치 심해 생물처럼 깊은 바닷속을 누비며 느릿하게 바닥을 훑고 지나가고, 제 살결에 닿은 그의 손길은 점차 옅어져갔다. 심해의 묵직한 것에 눈길이 팔려있을 때 즈음, 연하게 쓸어내리는 그의 목소리가 탁하게 귓가를 울렸다.

 -내일 봅시다.

 그 말에, 단 한마디에 그렇게 녹아내렸던 것이다. 오이카와는 여전히 차갑게 얼어붙은 볼을 매만지며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차가운 바람이 걷히고, 눅눅한 공기가 주위를 감싸자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눅진하게 얼어붙은 그 곳의 공기가 싫은 탓이었다.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이었으나 비온 후의 습한 공기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단지 맑은 날을 더 좋아했을 뿐일지도 모르겠다. 오이카와는 잡생각을 떨쳐버리고서 차의 시동을 걸고 추위를 녹였다. 차 안의 히터가 돌아가는 소리에 귓가가 웅웅 울렸으나 금세 그의 잔해가 다시 귓가에 가득 찼다. 오이카와는 애써 그 이질적인 감정을 마음속에 담으며 그를 지우려 노력했다.

 집에 도착하자 저를 맞이하는 건 차갑게 식은 냉기 어린 방이 아니었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얼굴을 보자마자 달려와서 손부터 들이 밀었다. 착잡하게 손에 들린 비닐봉지를 건네주고서야 자신의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를 죽 훑으며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분명 자신의 권유로 현관 문 비밀번호를 알려줬었고,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가 선수생활로 집을 비울 때마다 항상 오피스텔에 와서 생활했었으나 이렇게 갑작스럽게 방문했을 거라곤 생각을 못했었다. 오이카와는 머리를 긁적이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따뜻한 온기가 불어 들어왔다. 이와이즈미는 술상을 거하게 차려놓고선 오이카와를 기다리고 있었다. 첫 번째는 가볍게 맥주로.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를 앉히고선 냉장고에 캔 맥주를 가지러 갔다. 오이카와는 코트를 벗으며 앉았는데, 찝찝함에 샤워를 하러 가자니 이와이즈미의 호통이 두려웠다. 그는 이미 냉장고에 남아 있던 술 한 병을 다 마신 뒤였고, 조금 취해있었으나 아마 제가 방으로 들어가겠다고 한다면 불같이 화낼 터였다. 두려움에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오이카와는 다소곳이 앉아 이와이즈미를 기다렸다. 그가 준비해놓은 맥주잔을 받아들었다. 거하게 들이 붓는 대담한 그의 손길이 이토록 원망스러울 수가 있었던가. 내일 일하러 가야하는데. 거부하기엔 이와이즈미의 주정이 너무나 두려웠기에 그냥 마시기로 했다. 시원스레 넘어가는 샛노란 액체가 목 끝을 적셨다. 오이카와는 반 쯤 정신을 놓았고 , 그 후로 이와이즈미가 건네는 술을 곧이곧대로 받아마셨다. 뻗은 게 누가 먼저라고 말할 수 없었으나 확실한 건, 이와이즈미의 필름이 끊겼을 때 자신은 아직 소주잔을 홀짝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마지막 남은 잔을 깔끔하게 비우고서야 골아 떨어졌었는데, 한 2시간 정도 후에 이와이즈미가 다시 깨어나선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혼탁한 시야를 그에게 맞추고선 그를 바라보니 그는 멀쩡한 얼굴로 술을 한 병 들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눈을 찌푸리곤 흐릿한 눈길을 그의 얼굴에서 병으로 떨어뜨렸다. 그 존재를 보자마자 놀란 오이카와는 이미 신경에 먹힌 몸을 억지로 세우며 그에게로 다가가려 했으나 이미 그는 술병을 따놓은 뒤였다.

 '천사의 유혹'. 구하기 힘들어서 엄청 독한 마음을 먹고 산 거였는데. 육두문자가 입 밖으로 튀어 나갔을 지도 모르겠다. 이와이즈미는 가볍게 웃으며 다시 술잔에 '천사의 유혹'을 따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구한 건데 저게. 그 개 같은 선배님을 통해서 얻은 거란 말이야. 이제 구할 곳도 없는데, 어쩌지. 작은 술잔에 깔끔하게 채워진 그것을 보고 있자니 오이카와는 현기증이 밀려들어왔다. 마음 같아서는 친구고 뭐고 쫓아내고 싶었지만 그렇게 했다간 오히려 자신이 쫓겨날 수도 있었다. 만취한 이와이즈미 하지메는, 만취한 오이카와 토오루보다 힘이 세니까. 오이카와는 굳게 쥔 손을 풀었다. 체념한 상태로 다시 받아드니 그는 쉴 새 없이 제 잔으로 쏟아 내고 있었다. 쓰디 쓴 술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40도에 달하는 독한 술이라 조금 씩 먹으려고 했는데 이미 후회는 지나간 뒤였다. 천사의 달콤한 유혹이 귓가를 파고드는 것 같았다. 그건 마치 지옥의 불구덩이 속에서 나를 부르는 마츠카와의 목소리와도 닮아있었다.

 이와이즈미는 천사의 유혹을 다 마시고선, 빈 병을 짤랑대며 다른 술을 찾았다. 나는 고개를 양옆으로 흔들며 격렬하게 반대했으나 이번에도 이와이즈미의 손이 빨랐다.

 "그거, 그러니까 그건."

 "이게 뭐야아? '백년의 고독'? 이런 건 또 어디서 구했대? 나 먹어도 되냐?"

 "아, 그거 구하기 어려운데…."

 "쿠소카와. 이런 건 좀 나눠먹고 하는 거야. 응?"

 애석하게도, 이와이즈미는 애교 섞인 말투로 투정하고 있었다. 그것은 저만 알고 있는 주사였는데, 그는 처음엔 묵묵히 잘 마시다가 어느 정도가 넘어가면 기절하더니 한 두어 시간 뒤에 다시 일어나서 술을 다시 퍼마시는 것이었다. 일어나서 마시는 주량은 그 전보다 작았으나 도수가 문제였다. 그래서 매번 제 양주가 없어지는 탓도 저 놈 짓이었고, 그 끝에서 눈물짓는 건 오이카와였다. 사실 오이카와는 선수 기간 동안 술은 거의 마시지 못했고, 경기 끝나고 맥주나 홀짝이는 정도였다. 반면에 이와이즈미는 제가 힘들게 구해놓은 비싼 양주들을 뺏어 먹고선 미안하다고 물렀다. 그것도 늘, 항상.

 저 놈은 왜 술에 그렇게 취했는데도 발음도 무너지지 않는 건지 오이카와는 내심 궁금해졌다. 이와이즈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빠르게 줄어드는 술병을 보며, 이미 체념한 채로 그냥 들이켰다. 타들어가는 술의 여운이 짙게 물들었다. 깊게 쏟아지는 잠도 눈 주변에 머물렀다. 저런 독한 술을 다 마시겠다고 계속 따르는 이와이즈미도 대단했으나, 그걸 또 받아먹는 오이카와는 자신이 꽤나 한심하다고 자책하며 고꾸라졌다.

 난방은 또 왜 이렇게 세게 틀었는지 오이카와는 슬슬 올라오는 취기에 자면서 옷을 벗어던졌다. 실은 의식이 없었던 터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이와이즈미도 덩달아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 난방을 끌 생각도 하지 않은 채로, 뜨거운 술기운을 들이키며 깔아놓은 이불 위로 몸을 눕혔다. 이와이즈미도 남아있던 술을 다 마셨는지 제 옆으로 기어들어왔다. 그렇게 어영부영 정리하지도 않은 채 그들은 기나긴 잠에 취했다.

 다음 날 먼저 일어난 건, 이와이즈미였다. 아침부터 시끄럽게 울려대는 초인종 소리에,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현관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정장차림의 키 큰 남성이 이와이즈미의 앞에서 의아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주위를 번갈아 봤고, 손에 들려있는 쪽지도 훑었으나 무슨 일인지 판단이 서지 않는 것 같았다.

 "여기, 오이카와 토오루 씨네 집이 아닙니까?"

 "맞습니다만. 누구십니까?"

 "아, 저는 마츠카와 잇세이라고 합니다. 오이카와의 직장 동료죠."

 정확히는 오늘부터. 덧붙이려던 말을 생략하니 한껏 어색해진 분위기를 차마 이끌어가기가 힘들었다. 그나저나 이 사람은 누구지. 오이카와 씨랑 동거하는 사람인가. 오이카와, 그렇게 안 봤는데 남자관계가 꽤 문란하네, 와 같은 생각을 머릿속으로 덧붙이고 있던 도중에 현관문 밖으로 튀어나온 그 남자의 손이 마츠카와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마츠카와는 잠시 당황해서 멱살 잡은 손을 제지하며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제 생각을 읽힌 기분이었다. 아님 무의식에 입 밖으로 내뱉어버린 탓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누구라도 의심하지 않겠는가. 남자는 트렁크 한 장만 걸친 채로 추위에 오들오들 떨며 텁텁한 보일러의 공기가 터져 나오는 방안에서 붉게 물든 얼굴로 제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고, 살짝 열린 문틈사이로 보이는, 오이카와로 추정되는 발과, 널브러진 이불은 오해사기 딱 좋은 구도였다. 그는 눈을 부라리며 마츠카와에게 쏘아붙였다.

 "네가 그 망할 선배 새끼냐? 오이카와가 끔뻑 죽어 못산다던 그 개새끼? 시발, 오늘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난 선수도 아니니까 선배고 뭐고, 이 지랄 할 것도 없거든? 그러니까 입 꽉 물어라. 턱 빠질, 커억."

 이와이즈미의 소란에 오이카와는 흐릿한 눈길을 현관으로 향했다. 문 사이로 보이는 검은 정장이 어딘가 익숙했다. 그 위로 보이는 입술도, 코도, 눈도 전부 익숙했다. 맙소사. 그 사람이었다. 시계를 바라보자 나가기로 약속했던 시간은 넘어간 후였고, 거의 점심때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찾으러 온 거였나. 오이카와는 재빨리 현관으로 나가서 그의 멱살을 붙잡고 있는 이와이즈미를 제지했다.

 "그만해, 이와쨩. 개선배 아니니까 그 사람한테서 손 떼."

 그런데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조금 미묘했다. 아마도 그것은 어제 무의식적으로 벗어낸 옷가지들이 현관 뒤에 널브러져 있고, 오이카와의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쳐지지 않은 탓일 테다. 차가운 바람이 현관에서 방 안으로 퍼져들어왔다. 서늘한 공기가 살결에 닿자, 그의 시선 곳곳이 제 몸으로 향했다. 그것은 수치스럽다기보다 어쩐지 미묘한 시선에 가까워서, 대놓고 가리기에도 뻘쭘한 상황이었다. 여자애도 아니고, 같은 남자끼리 가리긴 왜 가려. 이런 느낌? 하지만 현관 앞에서 외간남자에게 알몸을 보이기에는 조금 수치스러운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는 소꿉친구인 이와이즈미와 달랐을 뿐더러 겨우 어제 만난 사람이었다. 목욕탕에서 서로의 몸을 끈적하게 바라볼 수도 있는, 단 한번 만날 뿐인 남남이 아니라 오늘부터 직장상사가 될 사람. 오이카와는 잠시 생각하더니 급히 방으로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그의 볼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이와쨩, 나 갔다 올게."

 "어, 그래. 갔다 와서 얘기하자."

 가볍게 인사를 마치고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지며 현관을 나섰다. 마츠카와는 그런 오이카와의 모습을 빤히 쳐다보더니 궁금한 질문들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여긴 누구집인지, 저 사람은 누군지, 밤에 뭘했길래 상태가 이런 건지 등을. 오이카와는 쏟아지는 질문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애써 온전한 정신을 붙잡으며 그의 질문에 응했다.

 "그러니까, 제 집인데요, 쟤는 친구고 오늘 쉬는 날이라 잠시 놀러온 것뿐인데. 아, 밤에는 술 밖에 안 마셨어요!"

 "술은 왜?"

 왜냐니. 저 새끼가 소주 광이라서 그렇지. 사실 다른 놈들 중엔 이와이즈미를 상대할 자식이 없어서 그런 것이었다. 오이카와는 말하기 어려운 질문에 머리만 긁적이며 살짝 미묘한 웃음을 흘겼다.

 "너무 많이 마시지는 마. 모델 되려면 그렇게 마시면 안 돼."

 "아, 네."

 "다음엔 내가 살 테니까, 친구는 떼놓고 와. 알겠지?"

 그럴 필요는 없는데. 자연스럽게 놓은 말도 인지하지 못한 채 오이카와는 고민했다. 그는 아직까지 자신의 주사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이와이즈미에게 물었을 때, 애교부리는 게 주사라고 듣긴 들었는데, 아직까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던 걸 보면 혹여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래도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오이카와는 대충 알겠다고 끄덕이며 그의 차를 타고 가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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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모델 해 볼 생각 없습니까?

 

 

 

 맞잡은 두 손에서 마츠카와는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세심한 감촉을 느꼈다. 오이카와의 손가락에는 훈련으로 단련된 굳은살이 자리 잡고 있었고, 곳곳으로 느껴지는 영광의 상처들이 손에 표식을 새겼다. 헌데도 유난히 눈에 띄는 건, 오이카와의 오른손에 여실히 드러난 흉터 자국이었다.

 마츠카와의 눈썹이 움찔거렸고, 곧이어 몰아 내쉬는 그의 숨소리에 오이카와는 약간 당황했지만 황급히 달려 나가는 마츠카와의 손에 이끌려 그 또한 주차장으로 뛰어갈 수밖에 없었다.

 눅눅한 공기를 머금은 지하 주차장의 불빛이 걸음마다 따라 나섰다. 차 앞에 다다르자 마지막으로 빛을 밝힌 구석의 한 자리에는 깔끔하게 반짝거리는 고급 세단 한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마츠카와의 손에 들린 차 키에서 고요한 울림이 퍼졌고, 이내 차 문은 열렸다. 차가운 냉기가 보이지 않는 주변을 에워쌌다. 마츠카와는 오이카와를 보조석에 태우고선, 자신도 운전석에 올라탔다. 끈적하게 달라붙던 손길의 여운이 아직까지도 손끝에 남아있던 까닭에, 핸들을 잡고서도 아직까지 심장이 뛰는 이유리라. 마츠카와는 시동을 걸었고, 때 마침 제 손에 들려있던 휴대폰에서 발신자의 전화번호가 나타났다. '지이(じい)'였다.

 여기에 대해 잠시 변명해보자면, 터무니없는 생각이었으나 지을 당시에는 굉장히 놀랍고 획기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마츠카와는 묻지도 않은 변명거리를 생각해냈다. 장난삼아 케이지, 케이지 하고 그를 이름으로 부르게 된 게 어엿 2년 째, 그리고 그런 그를 보고 있자면 무엇보다 절실하게 드는 생각이 '통화상대 명'을 바꿔야겠다는 것이었다. 마츠카와는 케이지를 읊조리다 끝 부분에서 영감을 얻어 '지이(영감)'가 되었다고 무색한 변명을 머릿속으로 되뇌어 보았다. 물론 그런 별명이 자리 잡기까진, 애늙은이라는 표현이 대신하고 있었다. 지이, 지이. 케이지. 마츠카와는 딱 세 번 마음속으로 아카아시의 이름을 외쳤다.

 열렬하게 울리는 휴대폰에 시선을 한 번 주고, 오이카와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무언의 표시와 함께 차에서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전화를 받았다.

 [마츠카와 상?]

 [아아, 미안해. 일이 좀 생겼거든. 오디션 잘 보고, 나중에 가게에서 봐.]

 [예,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행운을 빌어, 케이지.]

 귓가로 파고든 낮은 울림의 여운이 정적에 감싸였다. 다행히도 오이카와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차 안에 조용히 앉아있었다. 그는 간간히 뒤쪽 창문을 응시하며 마츠카와가 오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그가 도착했을 땐, 축축해진 옷깃을 붙잡고 오들오들 떨며 불편하게 앉아있는 오이카와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운전석에서 본 그의 몰골은 더더욱 비참했으나 그는 딱히 신경 쓰지 않을 듯 했다. 오히려 이 어색한 상황에 익숙해지지 못해 방황하는 것 같았다. 그의 모습이 욱신거리는 제 신경을 자극했다. 놀랍게도, 그것은 편파적인 반응이었으나 꽤나 타협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츠카와는 떨고 있는 그의 손을 마주잡고선 나지막하게 말했다.

 "많이 추우십니까."

 "아니 …, 괜찮습니다. 손 떠는 건 습관같은거라."

 그 후로 둘의 침묵만이 적적한 공기를 갈랐다. 갇혀있는 텁텁한 공기에 흐릿해진 정신을 부여잡고선 주차장에서 빠져나왔다. 방송국에서 가게까진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도착했다.

 가게는 꽤나 아담한 편이었다. 옅게 흩어지는 종소리를 들으며 오이카와는 어두컴컴했던 가게의 불이 켜지자마자 감탄을 자아낼 수밖에 없었다. 정갈하게 정돈된 가게의 깔끔함도 한 몫 했거니와, 그것보다도 분위기의 문제였다. 솔직히 말해, 맞춤정장이라고 들었을 때 이런 분위기를 상상했던 건 아니다. 고상하면서도 우아한 디자인이 벽지에 녹아있었고, 소품 하나하나에도 다 신경을 써 놓은 듯 한 느낌이었다. 오이카와는 그 아름다움 속에서 왠지 모를 이질감을 느꼈다. 저런 남자에게 이런 취향이 있었다니-정도의 이질감을. 실은 우아하고 고상한 디자인이기도 했으나 살짝은 여성스런 아기자기한 분위기여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오이카와가 잠시 말을 끊자 마츠카와는 의아하다는 듯 오이카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깨닫고는 오이카와에게 말을 걸었다.

 "왜 이런 분위긴지 알고 싶으신 겁니까?"

 "그걸 어떻게…."

 "그야 매번 찾아오시는 분들이 물어보시니까."

 "아…, 네."

 "실은 가게를 열기 전에, 이 가게 전체가 아틀리에였습니다. 그 때, 여성복을 만들던 친구가 있었는데, 일이 있어서 이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멍하니 가게를 바라보고 있던 오이카와의 앞을 스쳐지나가며 조심스런 시선을 보냈다.

 "제 아틀리에는 저깁니다."

 조심스레 내뱉은 말과 손이 오이카와를 안내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서 쪽문을 열고 내려가니 반지하로 된 아틀리에가 있었다. 그곳도 가게 못지않게 화려했다. 오이카와는 눈으로 주위를 훑으며 앞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마츠카와는 치수를 재기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고, 오이카와는 잠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곧이어 마츠카와는 그를 불렀고, 그는 조용히 마츠카와에게로 다가갔다.

 "오이카와 상, 잠시 이쪽으로."

 오이카와는 정장 자켓을 벗고 마츠카와가 지시하는 대로 몸을 세우자 그는 조심스레 오이카와의 치수를 재기 시작했다. 딱딱하게 긴장한 오이카와의 근육이 얇은 셔츠사이로 살짝 드러나자, 마츠카와는 치수를 재면서도 그 쪽으로 신경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혼자 감탄하며 오이카와의 근육을 쓸어내리고선, 입맛을 다시며 혼잣말을 이어갔다.

 "역시 운동선수라 그런지 비율이 좋네. 근육도 잘 짜여져 있고. 특히 이 부근이."

 "아…, 마츠카와 상!"

 오이카와의 들뜬 한숨에 마츠카와는 놀란 듯 바라보았으나 붉게 상기된 볼 말고는 별 문제가 없어보였다. 마츠카와는 오이카와의 손을 계속 붙잡고 있었다. 치수를 재겠다는 핑계를 두고, 팔의 길이를 재는 동안에도 한 쪽 손과 줄자의 끝부분은 오이카와의 손에 닿아있었다.

 "불편하면 말 놓아도 됩니다. 맛층이라고 불러도 좋고."

 "그게 아니고…!"

 "그럼?"

 "그, 거기, 손 좀 놓아주셨으면 하는데."

 오이카와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뒷걸음질 치자 마츠카와는 변명거리를 떠올려냈다.

 "아…, 아니, 세터라서 그런지 손이 예쁘길래 나도 모르게 그만."

 "…조금 춥네요."

 오이카와는 납득한 표정이었다. 머리를 긁적이며 부끄러워하는 그를 보며 마츠카와는 옅은 웃음을 지었다.

 "겨울이니까요. 감기 들겠다. 아, 그리고 기장은 다 쟀으니까, 다 만들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젖은 옷은 제가 세탁해 드릴 테니 일단 이거라고 입고 계세요."

 그가 내민 건, 청바지와 정장 셔츠, 니트였다. 오이카와는 아틀리에에 딸린 작은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었고, 세탁물은 마츠카와에게 건넸다. 그의 옷인지 좀 큰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적당히 맞았다. 추위에 감기 걸려 죽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막상 그의 옷을 입었다고 생각하니 부끄럽다기 보단, 조금 안일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그냥 세탁비만 받아서 와도 괜찮았을 법 한데 할 일도 없는 나머지 그냥 따라와 버린 제 자신이 조금 부끄러워졌다.

 마츠카와는 오이카와의 치수를 빠짐없이 기록하고, 다시 돌아와선 넌지시 그에게 물었다.

 "저, 혹시 모델 해 볼 생각 없습니까?"

 "모델이요?"

 "네. 피팅모델."

 "저, 내일부턴 일자리를 찾아봐야 해서, 그건 안…."

 "월급도 드릴 테니까."

 잠시 월급이란 소리에 혹 빠진 오이카와는 고민에 빠졌다. 옷까지 만들어 주신다는데, 좋은 기분으로 흔쾌히 수락했다. 마츠카와는 꽤나 기뻐했다. 오이카와에게 집 주소를 물은 뒤, 서로의 전화번호를 주고받았다. 가게 문 앞에서 둘은 조용히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럼 내일부터 바로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네. 내일 봬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10시까지 오시면 될 것 같습니다만."

 "맞춰서 오겠습니다."

 마츠카와는 오이카와를 보내고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가게로 들어갔다. 곧이어 딸랑거리는 종소리가 다시 귓가를 파고들었다. 오이카와가 다시 돌아온 건가 싶어 뒤를 돌아보았으나 애석하게도 그는 오이카와가 아니었다. 아카아시는 웃으며 들고 있던 대본을 흔들어 보였다. 마츠카와는 대수롭지 않게 그의 손에서 대본을 뺏어갔다. 펄럭거리는 소리가 둘의 공기를 갈랐다. 아카아시의 손이 아래로 떨어지고, 마츠카와는 그 큰 손으로 아카아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했다는, 격려의 의미로.

 아카아시는 오이카와가 붙지 못했던 오디션에 단번에 붙었으며, 주연 자리를 꿰찼다. 하지만 마츠카와로부터 충격적-이라기 보단 난감스러운- 소식을 전해 받으리라곤 상상하지 못했었다. 마츠카와는 아카아시에게 이제 피팅모델은 그만 해도 되겠다는 통보를 했다. 아카아시는 아쉬워하면서도 알겠다고 말했다.

 둘은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차를 마시며 잠시 가게에 있다가 밖으로 나갔다. 마츠카와는 가게의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카아시를 배웅했다. 마츠카와는 세탁할 오이카와의 정장과 아카아시의 정장을 챙겨들고 집으로 향했다. 아쉬운 마음에 돌아가는 마츠카와의 모습을 계속 뒤돌아보면서도 아카아시는 재빠르게 거리를 벗어났다. 조금, 추운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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