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오해는 금물

 

 

 

 오이카와는 뺨 끝에 남은 마츠카와의 진득했던 눈길을 곱씹으며 방송국까지 걸음을 옮겼다. 붉게 물든 왼쪽 뺨 언저리에는 마츠카와의 흔적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손끝이 주는 감각에 오이카와는 약간의 온기를 느꼈으나 찬바람에 이내 그 감각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마츠카와의 시린 웃음이 눈앞을 가렸다. 처진 눈 아래로 떨어지던 그의 잔해가 바닥을 뒤덮고선, 오이카와는 그 잔해 위에서 유영하던 한 마리 물고기였다. 펄떡이던 그의 숨소리를 들은 적이 있던가. 마치 심해 생물처럼 깊은 바닷속을 누비며 느릿하게 바닥을 훑고 지나가고, 제 살결에 닿은 그의 손길은 점차 옅어져갔다. 심해의 묵직한 것에 눈길이 팔려있을 때 즈음, 연하게 쓸어내리는 그의 목소리가 탁하게 귓가를 울렸다.

 -내일 봅시다.

 그 말에, 단 한마디에 그렇게 녹아내렸던 것이다. 오이카와는 여전히 차갑게 얼어붙은 볼을 매만지며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차가운 바람이 걷히고, 눅눅한 공기가 주위를 감싸자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눅진하게 얼어붙은 그 곳의 공기가 싫은 탓이었다.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이었으나 비온 후의 습한 공기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단지 맑은 날을 더 좋아했을 뿐일지도 모르겠다. 오이카와는 잡생각을 떨쳐버리고서 차의 시동을 걸고 추위를 녹였다. 차 안의 히터가 돌아가는 소리에 귓가가 웅웅 울렸으나 금세 그의 잔해가 다시 귓가에 가득 찼다. 오이카와는 애써 그 이질적인 감정을 마음속에 담으며 그를 지우려 노력했다.

 집에 도착하자 저를 맞이하는 건 차갑게 식은 냉기 어린 방이 아니었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얼굴을 보자마자 달려와서 손부터 들이 밀었다. 착잡하게 손에 들린 비닐봉지를 건네주고서야 자신의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를 죽 훑으며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분명 자신의 권유로 현관 문 비밀번호를 알려줬었고,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가 선수생활로 집을 비울 때마다 항상 오피스텔에 와서 생활했었으나 이렇게 갑작스럽게 방문했을 거라곤 생각을 못했었다. 오이카와는 머리를 긁적이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따뜻한 온기가 불어 들어왔다. 이와이즈미는 술상을 거하게 차려놓고선 오이카와를 기다리고 있었다. 첫 번째는 가볍게 맥주로.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를 앉히고선 냉장고에 캔 맥주를 가지러 갔다. 오이카와는 코트를 벗으며 앉았는데, 찝찝함에 샤워를 하러 가자니 이와이즈미의 호통이 두려웠다. 그는 이미 냉장고에 남아 있던 술 한 병을 다 마신 뒤였고, 조금 취해있었으나 아마 제가 방으로 들어가겠다고 한다면 불같이 화낼 터였다. 두려움에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오이카와는 다소곳이 앉아 이와이즈미를 기다렸다. 그가 준비해놓은 맥주잔을 받아들었다. 거하게 들이 붓는 대담한 그의 손길이 이토록 원망스러울 수가 있었던가. 내일 일하러 가야하는데. 거부하기엔 이와이즈미의 주정이 너무나 두려웠기에 그냥 마시기로 했다. 시원스레 넘어가는 샛노란 액체가 목 끝을 적셨다. 오이카와는 반 쯤 정신을 놓았고 , 그 후로 이와이즈미가 건네는 술을 곧이곧대로 받아마셨다. 뻗은 게 누가 먼저라고 말할 수 없었으나 확실한 건, 이와이즈미의 필름이 끊겼을 때 자신은 아직 소주잔을 홀짝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마지막 남은 잔을 깔끔하게 비우고서야 골아 떨어졌었는데, 한 2시간 정도 후에 이와이즈미가 다시 깨어나선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혼탁한 시야를 그에게 맞추고선 그를 바라보니 그는 멀쩡한 얼굴로 술을 한 병 들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눈을 찌푸리곤 흐릿한 눈길을 그의 얼굴에서 병으로 떨어뜨렸다. 그 존재를 보자마자 놀란 오이카와는 이미 신경에 먹힌 몸을 억지로 세우며 그에게로 다가가려 했으나 이미 그는 술병을 따놓은 뒤였다.

 '천사의 유혹'. 구하기 힘들어서 엄청 독한 마음을 먹고 산 거였는데. 육두문자가 입 밖으로 튀어 나갔을 지도 모르겠다. 이와이즈미는 가볍게 웃으며 다시 술잔에 '천사의 유혹'을 따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구한 건데 저게. 그 개 같은 선배님을 통해서 얻은 거란 말이야. 이제 구할 곳도 없는데, 어쩌지. 작은 술잔에 깔끔하게 채워진 그것을 보고 있자니 오이카와는 현기증이 밀려들어왔다. 마음 같아서는 친구고 뭐고 쫓아내고 싶었지만 그렇게 했다간 오히려 자신이 쫓겨날 수도 있었다. 만취한 이와이즈미 하지메는, 만취한 오이카와 토오루보다 힘이 세니까. 오이카와는 굳게 쥔 손을 풀었다. 체념한 상태로 다시 받아드니 그는 쉴 새 없이 제 잔으로 쏟아 내고 있었다. 쓰디 쓴 술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40도에 달하는 독한 술이라 조금 씩 먹으려고 했는데 이미 후회는 지나간 뒤였다. 천사의 달콤한 유혹이 귓가를 파고드는 것 같았다. 그건 마치 지옥의 불구덩이 속에서 나를 부르는 마츠카와의 목소리와도 닮아있었다.

 이와이즈미는 천사의 유혹을 다 마시고선, 빈 병을 짤랑대며 다른 술을 찾았다. 나는 고개를 양옆으로 흔들며 격렬하게 반대했으나 이번에도 이와이즈미의 손이 빨랐다.

 "그거, 그러니까 그건."

 "이게 뭐야아? '백년의 고독'? 이런 건 또 어디서 구했대? 나 먹어도 되냐?"

 "아, 그거 구하기 어려운데…."

 "쿠소카와. 이런 건 좀 나눠먹고 하는 거야. 응?"

 애석하게도, 이와이즈미는 애교 섞인 말투로 투정하고 있었다. 그것은 저만 알고 있는 주사였는데, 그는 처음엔 묵묵히 잘 마시다가 어느 정도가 넘어가면 기절하더니 한 두어 시간 뒤에 다시 일어나서 술을 다시 퍼마시는 것이었다. 일어나서 마시는 주량은 그 전보다 작았으나 도수가 문제였다. 그래서 매번 제 양주가 없어지는 탓도 저 놈 짓이었고, 그 끝에서 눈물짓는 건 오이카와였다. 사실 오이카와는 선수 기간 동안 술은 거의 마시지 못했고, 경기 끝나고 맥주나 홀짝이는 정도였다. 반면에 이와이즈미는 제가 힘들게 구해놓은 비싼 양주들을 뺏어 먹고선 미안하다고 물렀다. 그것도 늘, 항상.

 저 놈은 왜 술에 그렇게 취했는데도 발음도 무너지지 않는 건지 오이카와는 내심 궁금해졌다. 이와이즈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빠르게 줄어드는 술병을 보며, 이미 체념한 채로 그냥 들이켰다. 타들어가는 술의 여운이 짙게 물들었다. 깊게 쏟아지는 잠도 눈 주변에 머물렀다. 저런 독한 술을 다 마시겠다고 계속 따르는 이와이즈미도 대단했으나, 그걸 또 받아먹는 오이카와는 자신이 꽤나 한심하다고 자책하며 고꾸라졌다.

 난방은 또 왜 이렇게 세게 틀었는지 오이카와는 슬슬 올라오는 취기에 자면서 옷을 벗어던졌다. 실은 의식이 없었던 터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이와이즈미도 덩달아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 난방을 끌 생각도 하지 않은 채로, 뜨거운 술기운을 들이키며 깔아놓은 이불 위로 몸을 눕혔다. 이와이즈미도 남아있던 술을 다 마셨는지 제 옆으로 기어들어왔다. 그렇게 어영부영 정리하지도 않은 채 그들은 기나긴 잠에 취했다.

 다음 날 먼저 일어난 건, 이와이즈미였다. 아침부터 시끄럽게 울려대는 초인종 소리에,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현관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정장차림의 키 큰 남성이 이와이즈미의 앞에서 의아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주위를 번갈아 봤고, 손에 들려있는 쪽지도 훑었으나 무슨 일인지 판단이 서지 않는 것 같았다.

 "여기, 오이카와 토오루 씨네 집이 아닙니까?"

 "맞습니다만. 누구십니까?"

 "아, 저는 마츠카와 잇세이라고 합니다. 오이카와의 직장 동료죠."

 정확히는 오늘부터. 덧붙이려던 말을 생략하니 한껏 어색해진 분위기를 차마 이끌어가기가 힘들었다. 그나저나 이 사람은 누구지. 오이카와 씨랑 동거하는 사람인가. 오이카와, 그렇게 안 봤는데 남자관계가 꽤 문란하네, 와 같은 생각을 머릿속으로 덧붙이고 있던 도중에 현관문 밖으로 튀어나온 그 남자의 손이 마츠카와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마츠카와는 잠시 당황해서 멱살 잡은 손을 제지하며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제 생각을 읽힌 기분이었다. 아님 무의식에 입 밖으로 내뱉어버린 탓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누구라도 의심하지 않겠는가. 남자는 트렁크 한 장만 걸친 채로 추위에 오들오들 떨며 텁텁한 보일러의 공기가 터져 나오는 방안에서 붉게 물든 얼굴로 제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고, 살짝 열린 문틈사이로 보이는, 오이카와로 추정되는 발과, 널브러진 이불은 오해사기 딱 좋은 구도였다. 그는 눈을 부라리며 마츠카와에게 쏘아붙였다.

 "네가 그 망할 선배 새끼냐? 오이카와가 끔뻑 죽어 못산다던 그 개새끼? 시발, 오늘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난 선수도 아니니까 선배고 뭐고, 이 지랄 할 것도 없거든? 그러니까 입 꽉 물어라. 턱 빠질, 커억."

 이와이즈미의 소란에 오이카와는 흐릿한 눈길을 현관으로 향했다. 문 사이로 보이는 검은 정장이 어딘가 익숙했다. 그 위로 보이는 입술도, 코도, 눈도 전부 익숙했다. 맙소사. 그 사람이었다. 시계를 바라보자 나가기로 약속했던 시간은 넘어간 후였고, 거의 점심때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찾으러 온 거였나. 오이카와는 재빨리 현관으로 나가서 그의 멱살을 붙잡고 있는 이와이즈미를 제지했다.

 "그만해, 이와쨩. 개선배 아니니까 그 사람한테서 손 떼."

 그런데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조금 미묘했다. 아마도 그것은 어제 무의식적으로 벗어낸 옷가지들이 현관 뒤에 널브러져 있고, 오이카와의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쳐지지 않은 탓일 테다. 차가운 바람이 현관에서 방 안으로 퍼져들어왔다. 서늘한 공기가 살결에 닿자, 그의 시선 곳곳이 제 몸으로 향했다. 그것은 수치스럽다기보다 어쩐지 미묘한 시선에 가까워서, 대놓고 가리기에도 뻘쭘한 상황이었다. 여자애도 아니고, 같은 남자끼리 가리긴 왜 가려. 이런 느낌? 하지만 현관 앞에서 외간남자에게 알몸을 보이기에는 조금 수치스러운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는 소꿉친구인 이와이즈미와 달랐을 뿐더러 겨우 어제 만난 사람이었다. 목욕탕에서 서로의 몸을 끈적하게 바라볼 수도 있는, 단 한번 만날 뿐인 남남이 아니라 오늘부터 직장상사가 될 사람. 오이카와는 잠시 생각하더니 급히 방으로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그의 볼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이와쨩, 나 갔다 올게."

 "어, 그래. 갔다 와서 얘기하자."

 가볍게 인사를 마치고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지며 현관을 나섰다. 마츠카와는 그런 오이카와의 모습을 빤히 쳐다보더니 궁금한 질문들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여긴 누구집인지, 저 사람은 누군지, 밤에 뭘했길래 상태가 이런 건지 등을. 오이카와는 쏟아지는 질문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애써 온전한 정신을 붙잡으며 그의 질문에 응했다.

 "그러니까, 제 집인데요, 쟤는 친구고 오늘 쉬는 날이라 잠시 놀러온 것뿐인데. 아, 밤에는 술 밖에 안 마셨어요!"

 "술은 왜?"

 왜냐니. 저 새끼가 소주 광이라서 그렇지. 사실 다른 놈들 중엔 이와이즈미를 상대할 자식이 없어서 그런 것이었다. 오이카와는 말하기 어려운 질문에 머리만 긁적이며 살짝 미묘한 웃음을 흘겼다.

 "너무 많이 마시지는 마. 모델 되려면 그렇게 마시면 안 돼."

 "아, 네."

 "다음엔 내가 살 테니까, 친구는 떼놓고 와. 알겠지?"

 그럴 필요는 없는데. 자연스럽게 놓은 말도 인지하지 못한 채 오이카와는 고민했다. 그는 아직까지 자신의 주사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이와이즈미에게 물었을 때, 애교부리는 게 주사라고 듣긴 들었는데, 아직까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던 걸 보면 혹여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래도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오이카와는 대충 알겠다고 끄덕이며 그의 차를 타고 가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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