太宰


 꿈이었다. 꿈 속은 검은 물로 가득 차있었다. 나는 그 위를 걷고 있었다. 신발도 신고 있지 않았다. 맨발로 물 위를 걷는 기분이란, 실로 미묘한 것이어서 발바닥에 닿는 그 느낌마저도 이상했다.
 꼭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 청아한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진동해 제 귓가를 울리는 것과 동시에 먹먹한 정적만이 그 공간을 끊임없이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모든 고요가 내 귓가에 잠식했을 때야 나는 두려움을 감지할 수 있었다.
 내 발목을 휘어잡는 그 창백한 손은 발길질 한 번만으로 꺾일 것만 같이 섬약하게 보였다. 귀는 이미 먹먹해져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나, 끊임없이 아까의 그 잔청이 계속 울려댄다.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하고.
 푹꺼진 어둠의 심연에 허우적대던 그 하얀 손을 잡아올린 건, 얄팍한 동정심 때문이 아니었다. 그래, 미묘하지만 물 속에서 허우적대는 형체가 보인 것 같기도 하다. 그 부서질 듯한 연약한 손목을 잡아서 끌어올렸다. 그-사실 그라고 명명하기에는 너무 예쁘장한 여자아이 같은 모습이었던 남자아이-가 물에서 끌려나오던 순간, 눈을 떠버렸다. 허망한 꿈이 스치듯 사라졌다. 언뜻 기억나기에 어두컴컴한 곳이었던 건 기억나는 데, 그 이후는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머리가 백지처럼 하얘졌다.

 쿠니키다는 제가 가픈 숨을 내쉬는 걸 보더니 한숨을 푹 쉬면서 제게 다가왔다. 숙직실 소파에 기대 누워있던 나는 꿈을 떠올리다 말고 숨을 고르느라 바빴다. 그는 제 몰골을 보더니 그러려니 하며 가지고 있던 하얀 종이를 제게 건냈다.
 나는 그에게서 종이를 받아들고 머리를 대충 정리한 뒤 숙직실을 나섰다.  그도 나를 따라오며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이게 뭔데?"
 "거기 적힌 그대로."

 모르겠다는 둥 의아한 얼굴로 되묻자 쿠니키다는 제게 퉁명스레 답했다.

 "그래서, 내가 이걸 맡으란 말야?"
 "어쩔 수 없잖아. 상부에서 지시 내려온 거고. 너 같이 머리 텅빈 놈은 가서 따질 수라도 있지만, 내가 뭐라 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잖 …, 어이! 다자이!"

 쿠니키다가 뒤에서 무어라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으나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나는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은, 그가 건넨 그 종이를 접어 코트 안주머니에 쑤셔넣고는 뒤를 돌아 쿠니키다를 바라보았다.

 "미안, 나 지금부터 자살하러 갈꺼니까, 알아서 잘 부탁하네!"

 그러고는 뛰쳐나가는 제 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뭐 씹은 표정으로 방황하며 돌아다니는 그가 꽤 재미있어보여 나가기로 한 건 잠시 미루고 구석에 숨어있었다. 아까부터 계속 내 주변을 쫓아다니던 아츠시가 쿠니키다에게로 다가갔다. 아무래도 아까 했던 말들을 다 들었던 게 아닌가 싶다. 어둠이 짙게 드리운 쿠니키다의 뒤에서 아츠시가 말을 건냈다.

 "저러고도 어떻게 자살예방 캠페인 프로젝트를 맡으셨대요? 학교에선 저런 인간을 받아준답니까?"
 "저 놈이 가겠다고 한 게 아니라, 학교에서 하도 사정해대서 받아준 거랜다. 그 알량한 말솜씨로 애들한테 이상한 말이나 지껄이다 올걸."
 "그래도 조금 …."
 "상관없어. 일 내면 자기가 알아서 수습할 테고, 적당히 저 잘난 얼굴이나 보여주다 돌아오겠지. 걱정말고 순찰 준비나 해. 아, 그거 네가 맡을래?"
 "하기 싫다고 후배한테 막 돌리지 마세요. 상부에선 다자이 상한테 지시한 거라면서요. 굳이 또 제가 맡았다가 후쿠자와 상에게 한 소리 듣긴 싫습니다."
 " …뭐, 하기 싫음 말고. 빨리 챙기기나 해."
 "예."

 지극히 그들다운 대화였고, 그 특이점 하나 없는 평범란 말들에 지겨워졌기에 일어서려던 찰나, 아츠시 군이 저를 쳐다보며 안쓰러운 눈빛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그 이상의 호의는 보이지 않았다.

 "다자이 상."
 "무슨 일이라도?"

 어색하게 웃어보이는 제 모습을 보더니 못미더운 얼굴로 제 이름을 부르는 바람에 나는 구부정하게 화분 뒤에 숨겼던 몸을 세웠다. 아츠시 군은 걱정스럽단 얼굴로 다시 한 번 제게 물어보았다.

 "그거, 정말 하실겁니까."
 "위에서 내려온거라고. 거절할 수 있을리가 없잖아. 정부의 개라고 불리는 놈인데 이런 거 하나 못 할까. 자고로 충성스런 개한테 내려지는 달콤한 보상은 상상하는 그 이상이란 말이지, 아츠시 군."
 "준다해도 필요없습니다."
 "그래? 그럼 내가 다녀오겠네. 자살예방교육은 자네에게 맡기지."

 코트 주머니에서 그 하얀 종이를 꺼내들고 흔들거리자 아츠시 군의 표정은 점차 어두워졌다.

 "난 여기 다녀올테니, 학교가는 건 쿠니키다 군에게 잘 말해서 자네가 갔다오고."
 "그건,"
 "괜찮네, 학교에서도 별 신경 쓰지 않을 걸세. 그럼, 부탁하네."

 허망한 표정으로 제 얼굴를 지긋이 바라보던 아츠시를 뒤로하고 서를 빠져나왔다. 하여간 그 꼰대. 무슨 일이든 나한테 맡기지 않으면 좀이 쑤시나 보지. 나는 종이를 다시 펼쳐들었다. 바람에 펄럭이던 종이 안에서 붓으로 쓰인 정갈한 글씨체가 흔들렸다. 대체 요즘 시대에 사내 유선 전화로 통보해도 될 걸 왜 굳이 종이에 서써 전보를 보내냐 이거지.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글자를 읽어내렸다.


「다자이 군, 여기에 좀 다녀오게나. 위치는 밑에 사진으로도 찾을 수 있을게야. 자네가 가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래. 밤마다 비명소리가 들린다는데, 말 좀 잘해보게. 민원신고가 끊이질 않아.」


 민원신고, 라니. 고작 민원신고 때문에 내가 가야하는 건가. 그런거라면 굳이 내가 아니라도 나카지마 군이나 타니자키 군에게 맡겨도 상관 없었을 텐데. 내가 가지 않으면 해결하지 못할 일이란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확신할 수 없었으나, 결코 좋은 느낌은 들지 않았다. 혹여 성도착증 환자라든가, 정신나간 미친 놈이 날뛰고 있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사진 밑에는 작은 글씨로 무언가가 쓰여져 있었다.

 
「서에서 나와 직진하다보면 공터가 하나 나올텐데, 멈추지 말고 쭉 걷게나. 그러다보면 집들이 드문드문 거리가 멀어질 거야. 그러다 마지막에 허름한 집이 하나 있을거야, 빨간 우체통이 있는.」


 사진을 보며 찾다보니 어느새 시야에 빨간 우체통이 보일만큼의 거리에 다다랐다. 하지만 서에서 그렇게 먼 것 같지는 않았다. 나를 힐끔거리던 동네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쓰였다. 자기네들이 민원 넣어놓고 이리 내빼도 되는 건가. 이 궂은 일을 계속 도맡아온 타니자키 군이 정말 대단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저 집에 사는 사람에 대한 약간의 정보라도 얻으려 말을 걸어보려 했으나 다들 제 몰골을 보곤 자리를 피하거나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고개를 돌리기 일쑤였다. 별 수없이 그냥 집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뒤에서 한 여성이 제 코트를 잡아 끌었다.

 "어디서 오신 분인지는 모르겠지만 거긴 들어가지 말아요. 악마가 사는 곳이야, 거긴. 거기 들어가면 살아나오지 못해요."
 "경찰입니다."

 경찰증을 꺼내 보여주자 덜덜 떨던 여자의 등이 조금이나마 진정된 듯해 보였다. 

 "민원신고 받고 왔습니다. 저기 사는 사람에 대해 뭔가 아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아니요, 아니에요. 아무것도 모릅니다. 저기 사는 괴물은, 그건…."

 주저앉아 이상한 언어를 쏟아내던 여인을 진정시킨 후에야 나는 그 집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문이 닫혀 있는 것 같았지만 다행히 열려있었다.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열리는 현관문을 조심히 열어 젖히고선, 미세하게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어두운 그 집에 발을 내디뎠다. 어디서 본 것만 같은 곳이었다. 마치 그 꿈 속에서의 어둠과 같은 ….

 "누구 있으십니까? 이웃에서 민원 신고를 넣으셔서 부득이 하게 들어왔습니다만…,"

 손을 더듬어 벽에 있던 스위치를 누르자 천장에서 불이 깜박거리며 희미하게 자취를 남겼다. 빛의 잔상이 어린 그 단칸방에 있던 건 다름 아닌 소년이었다. 그것도 아주 앳된, 어린 소년.
 몸을 감싸 방구석에 구부정하게 앉아있는 그 모습은 한눈에 보기에도 안쓰러워 보였다. 툭 튀어나온 뼈마디마디가 고통스러워 보였으며, 한 몇 달은 굶은 듯한 얼굴에 핏기조차 없어 창백해 보이기까지 했다. 또, 그 새에 인기척을 느끼고는 느릿하게 나를 바라보는 그 눈빛마저도 흐릿했다. 삶의 의미를 잃은, 곧 죽을 때를 앞둔 노인네처럼 그의 눈에는 공허만이 가득했다.

 "부모님은…어디 계셔?"
 " … …."
 "여기 집에서 밤마다 소음이 너무 심하다고 민원이 들어왔는데, 혹시 부모님이 밤마다 싸우고 그러시니?"
 " … …."

 소년은 나를 응시하다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돌리고선, 벽을 마주보고 앉았다. 빨리 나가달란 의미였을까. 나는 눈을 한 번 치켜뜨고는, 그 가냘픈 뒷모습과 섬약해 보이는 목덜미에 초점을 맞추었다. 혈흔인지 모를 붉은 반점이 낭자하게 목덜미에 울긋불긋 나있었다. 한편으론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으나 상처가 난거라 단정짓고는 그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시키려 집을 나서는 도중, 현관에서 몸을 뒤돌던 찰나 그와 눈이 마주쳤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눈이었다. 조금씩 생기가 돌아오며 예의 어떤 광명을 찾은 듯했다. 그 애절한 눈빛은 마치 자신을 여기서 꺼내달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 이 지독하고 차가운 감옥에서.

 "나중에 다시 올게."

 소년은 아직까지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문이 닫히는 순간에는 어떠했을지 몰라도, 적어도 그 틈새로 보이던 그 표정은 두려움과 맞먹는 것이었다. 적어도 이름 정도는 물어 볼 걸 그랬다. 다음을 기약하고 다시 서로 돌아가려던 찰나 이번엔 아까와는 다른 여자가 제 앞에 마주섰다.

 "들어갔다가 뭔 일 없었죠?
 "예? 어, 예, 아무일도."
 "저기 저 여편네가 그 애 생모인데, 2년 전부터였나? 저렇게 미친듯이 집에 안 들어가려고 발악을 한다고. 괴물이 있다는데 집에 들어가려 하면 저 여자가 막아서니까 신경을 안쓸래야 그럴 수가 있나."

 그녀가 손으로 가리키는 곳에 아까 그 여자가 또 다른 사람을 붙잡고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쯔쯧, 여자가 미친게야. 악귀에 씌인거지. 하루는 남편이랑 몰래 저 집에 들어가 봤는데 애가 하나 있데? 그런데 애 상태가 이상했어. 막 뭐에 홀린 듯 떨고있긴 한데, 애 몸에 상처가 막 나있는 거야. 경찰에 신고하려고 하니까 애가 말리기에 그만, 이제까지 말 못하다가 최근에 들어서 밤마다 저 집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길래 신고했지."
 "잘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는 김에 저 여자도 어떻게 할 수 없나? 낮만 되면 집 안에 귀신이 있다느니 그러면서 밤만 되면 조심스레 슬금슬금 집으로 들어가는데 낮마다 행패를 부리는 걸 어찌 가만 두고 볼 수가 있나. 어디 정신병원에라도 보내야 하는 거 아닌가?"
 "잘, 잘 얘기해 보겠습니다."

 소년의 어머니라는 여자에게 다가갔을 때, 그녀의 눈빛이 나에게 닿는 그 순간순간의 찰나가 바람처럼 스쳐 지나갔다. 여자는 소년과 같은 모습으로 나를 외면했다. 경찰이라고 소개한 제 시선을 피하고, 마치 자신이 무언의 죄를 지은 죄인인 마냥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급기야 내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려 가까이 다가갔을 적 마저도 손을 내저었다.

 "부인, 말씀을 좀,"
 "난 할말 없습니다. 쟤는 악귀에 씌인거라고, 것도 남자 홀려먹는 악귀! 대체, 대체 왜…."
 "부인, 일단 진정하시고 제 말 좀,"
 "난 잘못한거 없다고! 그건 악귀 때문이야. 불쌍한 내 새끼 몸에 더러운 잡귀가 들어가서…, 그래서…."

 흐느껴 우는 여자에게 더이상 말을 걸 수가 없었기에 그냥 서로 발걸음을 옮겼다. 꽤 많이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발걸음이 무거워서 그런지 서로 가는 데에도 꽤 긴 시간이 걸렸다.
 곧장 서에 도착해서 그들 모자의 신상을 찾아보았다. 어머니인 여자는 쉽게 눈에 띄었다. 그러는 반면에 그 아이는 찾기가 힘들었으나 몇 번의 추적 끝에 그의 신상을 찾아냈다. 사진도 없고 다른 정보조차 불분명 한걸 보면 미성년자인 듯 했다. 18살, 이제 곧 성인이 될 나이였다. 순간 그 소년의 유약한 몸이 떠올랐다. 부러질 것만 같은, 고작 14살 정도 되어보이는 그 마른 몸이 이제 성인이 될 청년의 몸이란 게 놀랍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보단 걱정이 앞섰다. 슬슬 여자의 말이 정신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그 애는 악귀가 씌인거야, 것도 남자 홀려먹는 악귀 …! 그러니까 가까이 다가가지 마. 무언의 경고와도 같은 압박이 가슴을 억죄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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