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오해는 금물

 

 

 

 오이카와는 뺨 끝에 남은 마츠카와의 진득했던 눈길을 곱씹으며 방송국까지 걸음을 옮겼다. 붉게 물든 왼쪽 뺨 언저리에는 마츠카와의 흔적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손끝이 주는 감각에 오이카와는 약간의 온기를 느꼈으나 찬바람에 이내 그 감각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마츠카와의 시린 웃음이 눈앞을 가렸다. 처진 눈 아래로 떨어지던 그의 잔해가 바닥을 뒤덮고선, 오이카와는 그 잔해 위에서 유영하던 한 마리 물고기였다. 펄떡이던 그의 숨소리를 들은 적이 있던가. 마치 심해 생물처럼 깊은 바닷속을 누비며 느릿하게 바닥을 훑고 지나가고, 제 살결에 닿은 그의 손길은 점차 옅어져갔다. 심해의 묵직한 것에 눈길이 팔려있을 때 즈음, 연하게 쓸어내리는 그의 목소리가 탁하게 귓가를 울렸다.

 -내일 봅시다.

 그 말에, 단 한마디에 그렇게 녹아내렸던 것이다. 오이카와는 여전히 차갑게 얼어붙은 볼을 매만지며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차가운 바람이 걷히고, 눅눅한 공기가 주위를 감싸자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눅진하게 얼어붙은 그 곳의 공기가 싫은 탓이었다.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이었으나 비온 후의 습한 공기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단지 맑은 날을 더 좋아했을 뿐일지도 모르겠다. 오이카와는 잡생각을 떨쳐버리고서 차의 시동을 걸고 추위를 녹였다. 차 안의 히터가 돌아가는 소리에 귓가가 웅웅 울렸으나 금세 그의 잔해가 다시 귓가에 가득 찼다. 오이카와는 애써 그 이질적인 감정을 마음속에 담으며 그를 지우려 노력했다.

 집에 도착하자 저를 맞이하는 건 차갑게 식은 냉기 어린 방이 아니었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얼굴을 보자마자 달려와서 손부터 들이 밀었다. 착잡하게 손에 들린 비닐봉지를 건네주고서야 자신의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를 죽 훑으며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분명 자신의 권유로 현관 문 비밀번호를 알려줬었고,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가 선수생활로 집을 비울 때마다 항상 오피스텔에 와서 생활했었으나 이렇게 갑작스럽게 방문했을 거라곤 생각을 못했었다. 오이카와는 머리를 긁적이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따뜻한 온기가 불어 들어왔다. 이와이즈미는 술상을 거하게 차려놓고선 오이카와를 기다리고 있었다. 첫 번째는 가볍게 맥주로.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를 앉히고선 냉장고에 캔 맥주를 가지러 갔다. 오이카와는 코트를 벗으며 앉았는데, 찝찝함에 샤워를 하러 가자니 이와이즈미의 호통이 두려웠다. 그는 이미 냉장고에 남아 있던 술 한 병을 다 마신 뒤였고, 조금 취해있었으나 아마 제가 방으로 들어가겠다고 한다면 불같이 화낼 터였다. 두려움에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오이카와는 다소곳이 앉아 이와이즈미를 기다렸다. 그가 준비해놓은 맥주잔을 받아들었다. 거하게 들이 붓는 대담한 그의 손길이 이토록 원망스러울 수가 있었던가. 내일 일하러 가야하는데. 거부하기엔 이와이즈미의 주정이 너무나 두려웠기에 그냥 마시기로 했다. 시원스레 넘어가는 샛노란 액체가 목 끝을 적셨다. 오이카와는 반 쯤 정신을 놓았고 , 그 후로 이와이즈미가 건네는 술을 곧이곧대로 받아마셨다. 뻗은 게 누가 먼저라고 말할 수 없었으나 확실한 건, 이와이즈미의 필름이 끊겼을 때 자신은 아직 소주잔을 홀짝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마지막 남은 잔을 깔끔하게 비우고서야 골아 떨어졌었는데, 한 2시간 정도 후에 이와이즈미가 다시 깨어나선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혼탁한 시야를 그에게 맞추고선 그를 바라보니 그는 멀쩡한 얼굴로 술을 한 병 들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눈을 찌푸리곤 흐릿한 눈길을 그의 얼굴에서 병으로 떨어뜨렸다. 그 존재를 보자마자 놀란 오이카와는 이미 신경에 먹힌 몸을 억지로 세우며 그에게로 다가가려 했으나 이미 그는 술병을 따놓은 뒤였다.

 '천사의 유혹'. 구하기 힘들어서 엄청 독한 마음을 먹고 산 거였는데. 육두문자가 입 밖으로 튀어 나갔을 지도 모르겠다. 이와이즈미는 가볍게 웃으며 다시 술잔에 '천사의 유혹'을 따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구한 건데 저게. 그 개 같은 선배님을 통해서 얻은 거란 말이야. 이제 구할 곳도 없는데, 어쩌지. 작은 술잔에 깔끔하게 채워진 그것을 보고 있자니 오이카와는 현기증이 밀려들어왔다. 마음 같아서는 친구고 뭐고 쫓아내고 싶었지만 그렇게 했다간 오히려 자신이 쫓겨날 수도 있었다. 만취한 이와이즈미 하지메는, 만취한 오이카와 토오루보다 힘이 세니까. 오이카와는 굳게 쥔 손을 풀었다. 체념한 상태로 다시 받아드니 그는 쉴 새 없이 제 잔으로 쏟아 내고 있었다. 쓰디 쓴 술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40도에 달하는 독한 술이라 조금 씩 먹으려고 했는데 이미 후회는 지나간 뒤였다. 천사의 달콤한 유혹이 귓가를 파고드는 것 같았다. 그건 마치 지옥의 불구덩이 속에서 나를 부르는 마츠카와의 목소리와도 닮아있었다.

 이와이즈미는 천사의 유혹을 다 마시고선, 빈 병을 짤랑대며 다른 술을 찾았다. 나는 고개를 양옆으로 흔들며 격렬하게 반대했으나 이번에도 이와이즈미의 손이 빨랐다.

 "그거, 그러니까 그건."

 "이게 뭐야아? '백년의 고독'? 이런 건 또 어디서 구했대? 나 먹어도 되냐?"

 "아, 그거 구하기 어려운데…."

 "쿠소카와. 이런 건 좀 나눠먹고 하는 거야. 응?"

 애석하게도, 이와이즈미는 애교 섞인 말투로 투정하고 있었다. 그것은 저만 알고 있는 주사였는데, 그는 처음엔 묵묵히 잘 마시다가 어느 정도가 넘어가면 기절하더니 한 두어 시간 뒤에 다시 일어나서 술을 다시 퍼마시는 것이었다. 일어나서 마시는 주량은 그 전보다 작았으나 도수가 문제였다. 그래서 매번 제 양주가 없어지는 탓도 저 놈 짓이었고, 그 끝에서 눈물짓는 건 오이카와였다. 사실 오이카와는 선수 기간 동안 술은 거의 마시지 못했고, 경기 끝나고 맥주나 홀짝이는 정도였다. 반면에 이와이즈미는 제가 힘들게 구해놓은 비싼 양주들을 뺏어 먹고선 미안하다고 물렀다. 그것도 늘, 항상.

 저 놈은 왜 술에 그렇게 취했는데도 발음도 무너지지 않는 건지 오이카와는 내심 궁금해졌다. 이와이즈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빠르게 줄어드는 술병을 보며, 이미 체념한 채로 그냥 들이켰다. 타들어가는 술의 여운이 짙게 물들었다. 깊게 쏟아지는 잠도 눈 주변에 머물렀다. 저런 독한 술을 다 마시겠다고 계속 따르는 이와이즈미도 대단했으나, 그걸 또 받아먹는 오이카와는 자신이 꽤나 한심하다고 자책하며 고꾸라졌다.

 난방은 또 왜 이렇게 세게 틀었는지 오이카와는 슬슬 올라오는 취기에 자면서 옷을 벗어던졌다. 실은 의식이 없었던 터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이와이즈미도 덩달아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 난방을 끌 생각도 하지 않은 채로, 뜨거운 술기운을 들이키며 깔아놓은 이불 위로 몸을 눕혔다. 이와이즈미도 남아있던 술을 다 마셨는지 제 옆으로 기어들어왔다. 그렇게 어영부영 정리하지도 않은 채 그들은 기나긴 잠에 취했다.

 다음 날 먼저 일어난 건, 이와이즈미였다. 아침부터 시끄럽게 울려대는 초인종 소리에,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현관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정장차림의 키 큰 남성이 이와이즈미의 앞에서 의아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주위를 번갈아 봤고, 손에 들려있는 쪽지도 훑었으나 무슨 일인지 판단이 서지 않는 것 같았다.

 "여기, 오이카와 토오루 씨네 집이 아닙니까?"

 "맞습니다만. 누구십니까?"

 "아, 저는 마츠카와 잇세이라고 합니다. 오이카와의 직장 동료죠."

 정확히는 오늘부터. 덧붙이려던 말을 생략하니 한껏 어색해진 분위기를 차마 이끌어가기가 힘들었다. 그나저나 이 사람은 누구지. 오이카와 씨랑 동거하는 사람인가. 오이카와, 그렇게 안 봤는데 남자관계가 꽤 문란하네, 와 같은 생각을 머릿속으로 덧붙이고 있던 도중에 현관문 밖으로 튀어나온 그 남자의 손이 마츠카와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마츠카와는 잠시 당황해서 멱살 잡은 손을 제지하며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제 생각을 읽힌 기분이었다. 아님 무의식에 입 밖으로 내뱉어버린 탓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누구라도 의심하지 않겠는가. 남자는 트렁크 한 장만 걸친 채로 추위에 오들오들 떨며 텁텁한 보일러의 공기가 터져 나오는 방안에서 붉게 물든 얼굴로 제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고, 살짝 열린 문틈사이로 보이는, 오이카와로 추정되는 발과, 널브러진 이불은 오해사기 딱 좋은 구도였다. 그는 눈을 부라리며 마츠카와에게 쏘아붙였다.

 "네가 그 망할 선배 새끼냐? 오이카와가 끔뻑 죽어 못산다던 그 개새끼? 시발, 오늘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난 선수도 아니니까 선배고 뭐고, 이 지랄 할 것도 없거든? 그러니까 입 꽉 물어라. 턱 빠질, 커억."

 이와이즈미의 소란에 오이카와는 흐릿한 눈길을 현관으로 향했다. 문 사이로 보이는 검은 정장이 어딘가 익숙했다. 그 위로 보이는 입술도, 코도, 눈도 전부 익숙했다. 맙소사. 그 사람이었다. 시계를 바라보자 나가기로 약속했던 시간은 넘어간 후였고, 거의 점심때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찾으러 온 거였나. 오이카와는 재빨리 현관으로 나가서 그의 멱살을 붙잡고 있는 이와이즈미를 제지했다.

 "그만해, 이와쨩. 개선배 아니니까 그 사람한테서 손 떼."

 그런데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조금 미묘했다. 아마도 그것은 어제 무의식적으로 벗어낸 옷가지들이 현관 뒤에 널브러져 있고, 오이카와의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쳐지지 않은 탓일 테다. 차가운 바람이 현관에서 방 안으로 퍼져들어왔다. 서늘한 공기가 살결에 닿자, 그의 시선 곳곳이 제 몸으로 향했다. 그것은 수치스럽다기보다 어쩐지 미묘한 시선에 가까워서, 대놓고 가리기에도 뻘쭘한 상황이었다. 여자애도 아니고, 같은 남자끼리 가리긴 왜 가려. 이런 느낌? 하지만 현관 앞에서 외간남자에게 알몸을 보이기에는 조금 수치스러운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는 소꿉친구인 이와이즈미와 달랐을 뿐더러 겨우 어제 만난 사람이었다. 목욕탕에서 서로의 몸을 끈적하게 바라볼 수도 있는, 단 한번 만날 뿐인 남남이 아니라 오늘부터 직장상사가 될 사람. 오이카와는 잠시 생각하더니 급히 방으로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그의 볼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이와쨩, 나 갔다 올게."

 "어, 그래. 갔다 와서 얘기하자."

 가볍게 인사를 마치고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지며 현관을 나섰다. 마츠카와는 그런 오이카와의 모습을 빤히 쳐다보더니 궁금한 질문들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여긴 누구집인지, 저 사람은 누군지, 밤에 뭘했길래 상태가 이런 건지 등을. 오이카와는 쏟아지는 질문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애써 온전한 정신을 붙잡으며 그의 질문에 응했다.

 "그러니까, 제 집인데요, 쟤는 친구고 오늘 쉬는 날이라 잠시 놀러온 것뿐인데. 아, 밤에는 술 밖에 안 마셨어요!"

 "술은 왜?"

 왜냐니. 저 새끼가 소주 광이라서 그렇지. 사실 다른 놈들 중엔 이와이즈미를 상대할 자식이 없어서 그런 것이었다. 오이카와는 말하기 어려운 질문에 머리만 긁적이며 살짝 미묘한 웃음을 흘겼다.

 "너무 많이 마시지는 마. 모델 되려면 그렇게 마시면 안 돼."

 "아, 네."

 "다음엔 내가 살 테니까, 친구는 떼놓고 와. 알겠지?"

 그럴 필요는 없는데. 자연스럽게 놓은 말도 인지하지 못한 채 오이카와는 고민했다. 그는 아직까지 자신의 주사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이와이즈미에게 물었을 때, 애교부리는 게 주사라고 듣긴 들었는데, 아직까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던 걸 보면 혹여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래도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오이카와는 대충 알겠다고 끄덕이며 그의 차를 타고 가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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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델 해 볼 생각 없습니까?

 

 

 

 맞잡은 두 손에서 마츠카와는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세심한 감촉을 느꼈다. 오이카와의 손가락에는 훈련으로 단련된 굳은살이 자리 잡고 있었고, 곳곳으로 느껴지는 영광의 상처들이 손에 표식을 새겼다. 헌데도 유난히 눈에 띄는 건, 오이카와의 오른손에 여실히 드러난 흉터 자국이었다.

 마츠카와의 눈썹이 움찔거렸고, 곧이어 몰아 내쉬는 그의 숨소리에 오이카와는 약간 당황했지만 황급히 달려 나가는 마츠카와의 손에 이끌려 그 또한 주차장으로 뛰어갈 수밖에 없었다.

 눅눅한 공기를 머금은 지하 주차장의 불빛이 걸음마다 따라 나섰다. 차 앞에 다다르자 마지막으로 빛을 밝힌 구석의 한 자리에는 깔끔하게 반짝거리는 고급 세단 한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마츠카와의 손에 들린 차 키에서 고요한 울림이 퍼졌고, 이내 차 문은 열렸다. 차가운 냉기가 보이지 않는 주변을 에워쌌다. 마츠카와는 오이카와를 보조석에 태우고선, 자신도 운전석에 올라탔다. 끈적하게 달라붙던 손길의 여운이 아직까지도 손끝에 남아있던 까닭에, 핸들을 잡고서도 아직까지 심장이 뛰는 이유리라. 마츠카와는 시동을 걸었고, 때 마침 제 손에 들려있던 휴대폰에서 발신자의 전화번호가 나타났다. '지이(じい)'였다.

 여기에 대해 잠시 변명해보자면, 터무니없는 생각이었으나 지을 당시에는 굉장히 놀랍고 획기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마츠카와는 묻지도 않은 변명거리를 생각해냈다. 장난삼아 케이지, 케이지 하고 그를 이름으로 부르게 된 게 어엿 2년 째, 그리고 그런 그를 보고 있자면 무엇보다 절실하게 드는 생각이 '통화상대 명'을 바꿔야겠다는 것이었다. 마츠카와는 케이지를 읊조리다 끝 부분에서 영감을 얻어 '지이(영감)'가 되었다고 무색한 변명을 머릿속으로 되뇌어 보았다. 물론 그런 별명이 자리 잡기까진, 애늙은이라는 표현이 대신하고 있었다. 지이, 지이. 케이지. 마츠카와는 딱 세 번 마음속으로 아카아시의 이름을 외쳤다.

 열렬하게 울리는 휴대폰에 시선을 한 번 주고, 오이카와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무언의 표시와 함께 차에서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전화를 받았다.

 [마츠카와 상?]

 [아아, 미안해. 일이 좀 생겼거든. 오디션 잘 보고, 나중에 가게에서 봐.]

 [예,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행운을 빌어, 케이지.]

 귓가로 파고든 낮은 울림의 여운이 정적에 감싸였다. 다행히도 오이카와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차 안에 조용히 앉아있었다. 그는 간간히 뒤쪽 창문을 응시하며 마츠카와가 오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그가 도착했을 땐, 축축해진 옷깃을 붙잡고 오들오들 떨며 불편하게 앉아있는 오이카와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운전석에서 본 그의 몰골은 더더욱 비참했으나 그는 딱히 신경 쓰지 않을 듯 했다. 오히려 이 어색한 상황에 익숙해지지 못해 방황하는 것 같았다. 그의 모습이 욱신거리는 제 신경을 자극했다. 놀랍게도, 그것은 편파적인 반응이었으나 꽤나 타협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츠카와는 떨고 있는 그의 손을 마주잡고선 나지막하게 말했다.

 "많이 추우십니까."

 "아니 …, 괜찮습니다. 손 떠는 건 습관같은거라."

 그 후로 둘의 침묵만이 적적한 공기를 갈랐다. 갇혀있는 텁텁한 공기에 흐릿해진 정신을 부여잡고선 주차장에서 빠져나왔다. 방송국에서 가게까진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도착했다.

 가게는 꽤나 아담한 편이었다. 옅게 흩어지는 종소리를 들으며 오이카와는 어두컴컴했던 가게의 불이 켜지자마자 감탄을 자아낼 수밖에 없었다. 정갈하게 정돈된 가게의 깔끔함도 한 몫 했거니와, 그것보다도 분위기의 문제였다. 솔직히 말해, 맞춤정장이라고 들었을 때 이런 분위기를 상상했던 건 아니다. 고상하면서도 우아한 디자인이 벽지에 녹아있었고, 소품 하나하나에도 다 신경을 써 놓은 듯 한 느낌이었다. 오이카와는 그 아름다움 속에서 왠지 모를 이질감을 느꼈다. 저런 남자에게 이런 취향이 있었다니-정도의 이질감을. 실은 우아하고 고상한 디자인이기도 했으나 살짝은 여성스런 아기자기한 분위기여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오이카와가 잠시 말을 끊자 마츠카와는 의아하다는 듯 오이카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깨닫고는 오이카와에게 말을 걸었다.

 "왜 이런 분위긴지 알고 싶으신 겁니까?"

 "그걸 어떻게…."

 "그야 매번 찾아오시는 분들이 물어보시니까."

 "아…, 네."

 "실은 가게를 열기 전에, 이 가게 전체가 아틀리에였습니다. 그 때, 여성복을 만들던 친구가 있었는데, 일이 있어서 이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멍하니 가게를 바라보고 있던 오이카와의 앞을 스쳐지나가며 조심스런 시선을 보냈다.

 "제 아틀리에는 저깁니다."

 조심스레 내뱉은 말과 손이 오이카와를 안내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서 쪽문을 열고 내려가니 반지하로 된 아틀리에가 있었다. 그곳도 가게 못지않게 화려했다. 오이카와는 눈으로 주위를 훑으며 앞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마츠카와는 치수를 재기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고, 오이카와는 잠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곧이어 마츠카와는 그를 불렀고, 그는 조용히 마츠카와에게로 다가갔다.

 "오이카와 상, 잠시 이쪽으로."

 오이카와는 정장 자켓을 벗고 마츠카와가 지시하는 대로 몸을 세우자 그는 조심스레 오이카와의 치수를 재기 시작했다. 딱딱하게 긴장한 오이카와의 근육이 얇은 셔츠사이로 살짝 드러나자, 마츠카와는 치수를 재면서도 그 쪽으로 신경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혼자 감탄하며 오이카와의 근육을 쓸어내리고선, 입맛을 다시며 혼잣말을 이어갔다.

 "역시 운동선수라 그런지 비율이 좋네. 근육도 잘 짜여져 있고. 특히 이 부근이."

 "아…, 마츠카와 상!"

 오이카와의 들뜬 한숨에 마츠카와는 놀란 듯 바라보았으나 붉게 상기된 볼 말고는 별 문제가 없어보였다. 마츠카와는 오이카와의 손을 계속 붙잡고 있었다. 치수를 재겠다는 핑계를 두고, 팔의 길이를 재는 동안에도 한 쪽 손과 줄자의 끝부분은 오이카와의 손에 닿아있었다.

 "불편하면 말 놓아도 됩니다. 맛층이라고 불러도 좋고."

 "그게 아니고…!"

 "그럼?"

 "그, 거기, 손 좀 놓아주셨으면 하는데."

 오이카와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뒷걸음질 치자 마츠카와는 변명거리를 떠올려냈다.

 "아…, 아니, 세터라서 그런지 손이 예쁘길래 나도 모르게 그만."

 "…조금 춥네요."

 오이카와는 납득한 표정이었다. 머리를 긁적이며 부끄러워하는 그를 보며 마츠카와는 옅은 웃음을 지었다.

 "겨울이니까요. 감기 들겠다. 아, 그리고 기장은 다 쟀으니까, 다 만들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젖은 옷은 제가 세탁해 드릴 테니 일단 이거라고 입고 계세요."

 그가 내민 건, 청바지와 정장 셔츠, 니트였다. 오이카와는 아틀리에에 딸린 작은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었고, 세탁물은 마츠카와에게 건넸다. 그의 옷인지 좀 큰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적당히 맞았다. 추위에 감기 걸려 죽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막상 그의 옷을 입었다고 생각하니 부끄럽다기 보단, 조금 안일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그냥 세탁비만 받아서 와도 괜찮았을 법 한데 할 일도 없는 나머지 그냥 따라와 버린 제 자신이 조금 부끄러워졌다.

 마츠카와는 오이카와의 치수를 빠짐없이 기록하고, 다시 돌아와선 넌지시 그에게 물었다.

 "저, 혹시 모델 해 볼 생각 없습니까?"

 "모델이요?"

 "네. 피팅모델."

 "저, 내일부턴 일자리를 찾아봐야 해서, 그건 안…."

 "월급도 드릴 테니까."

 잠시 월급이란 소리에 혹 빠진 오이카와는 고민에 빠졌다. 옷까지 만들어 주신다는데, 좋은 기분으로 흔쾌히 수락했다. 마츠카와는 꽤나 기뻐했다. 오이카와에게 집 주소를 물은 뒤, 서로의 전화번호를 주고받았다. 가게 문 앞에서 둘은 조용히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럼 내일부터 바로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네. 내일 봬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10시까지 오시면 될 것 같습니다만."

 "맞춰서 오겠습니다."

 마츠카와는 오이카와를 보내고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가게로 들어갔다. 곧이어 딸랑거리는 종소리가 다시 귓가를 파고들었다. 오이카와가 다시 돌아온 건가 싶어 뒤를 돌아보았으나 애석하게도 그는 오이카와가 아니었다. 아카아시는 웃으며 들고 있던 대본을 흔들어 보였다. 마츠카와는 대수롭지 않게 그의 손에서 대본을 뺏어갔다. 펄럭거리는 소리가 둘의 공기를 갈랐다. 아카아시의 손이 아래로 떨어지고, 마츠카와는 그 큰 손으로 아카아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했다는, 격려의 의미로.

 아카아시는 오이카와가 붙지 못했던 오디션에 단번에 붙었으며, 주연 자리를 꿰찼다. 하지만 마츠카와로부터 충격적-이라기 보단 난감스러운- 소식을 전해 받으리라곤 상상하지 못했었다. 마츠카와는 아카아시에게 이제 피팅모델은 그만 해도 되겠다는 통보를 했다. 아카아시는 아쉬워하면서도 알겠다고 말했다.

 둘은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차를 마시며 잠시 가게에 있다가 밖으로 나갔다. 마츠카와는 가게의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카아시를 배웅했다. 마츠카와는 세탁할 오이카와의 정장과 아카아시의 정장을 챙겨들고 집으로 향했다. 아쉬운 마음에 돌아가는 마츠카와의 모습을 계속 뒤돌아보면서도 아카아시는 재빠르게 거리를 벗어났다. 조금, 추운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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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첫 만남은 우연

 

 

 필연은 아닐지언정, 그건 우연에 가까웠다.

 그 날은, 그의 은퇴기사가 공공연하게 떠다니던 날이었다. TV를 쳐다보던 그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탁상위에 있던 리모컨을 들어 채널을 옮겼으나, 불행하게도 온통 자신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다시 선수생활을 재개하지 않을까, 와 같은 여론이 몰려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의 손은 회복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오이카와는 움직거리던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뚜둑거리던 뼛소리와 손의 감촉이 선명하게 제 기억을 덮친다. 그리고 뒤이어 차가운 감촉이 제 손을 어루만졌다. 오이카와는 생각했다. 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런 수모를 겪어야 하냐며, 천장에서 밝게 새어나오는 빛 때문에 검은 그림자로 보일 뿐인 지극히 평범한 남성에게 따지듯이 입을 열었으나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정신은 점점 무뎌졌으나 신경은 무뎌지지 않고 선명했다. 살갗을 파고들어오던 쇳덩이의 감촉이 신경을 자극하고, 거의 산산 조각난 뼛조각에는 마취약이 들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몸은 고통에 울부짖으며 수술이 끝나기만을 간절히 기다릴 뿐이었다.

 마취의 효과가 떨어지자마자 극심한 통증이 밀려들어왔다. 성급하게 끊어진 신경을 이어 붙인 듯 뼈 마디마디에 통증을 느꼈다. 오이카와는 깨어나지 않으려 했으나, 시끄러운 소음이 귓가를 파고들어 몽롱한 정신을 깨웠다. 하지만 그를 깨우려는 건 비단 그것뿐만이 아니었으리라. 마취에 풀려 허공에 대고 허우적거리던 그의 손을 잡은 건 감독님이셨다. 그는 아직 마취가 덜 풀렸는지 눈은 반쯤 감은채로, 죽은 사람이 이승에 내놓은 영혼을 찾듯이 필사적으로 손을 잡았다. 그러나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순간 오이카와는 몽롱한 상태였으나 자신의 몸이 뜻대로 할 수 없어졌음을 깨닫고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허공을 휘젓던 손과, 감독님의 억센 손아귀에 팔목이 잡혔을 때조차도 반항하던 그가 현실을 받아들이고 손에 힘을 풀었다. 살짝 뜬 눈 위로 수술실의 전등이 어른거리고, 그 위로 감독님의 얼굴이 덧대어졌다. 병원 특유의 시큼한 향기가 코를 간질였다. 정신마저도 잠식된, 기나긴 잠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그는 비로소 다시 태어난 것에 대해 감사했다. 하마터면 그대로 죽을 뻔 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테다. 아무래도 뒤 끝이 찝찝하더라니. 그는 움직이지 못하는 손을 애써 감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야에 들어온 건, 도쿄 대학 병원의 마크가 새겨진 병원 이불과 입원실 내에 비치된 작은 냉장고, TV정도뿐이었다. 창문은 열려있었다. 1인실이어서 딱히 시끄럽지는 않았으나, 열린 창문 사이로 바람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아마 감독님께서 열어 놓으셨을 테다. 이 추운 겨울에, 대체 왜. 환기를 위해서? 아니. 바깥의 공기를 맡고, 어서 일어나라고. 무의식중에 그런 목소리가 들렸다. 병원 공기만 맡다간 그대로 갈지도 모르겠다고. 먼저 가 버릴까봐, 불편하다고. 정작 감독님께선 불편하게 간의 침대에서 숙면을 취하고 계셨다.

 아직 밤이었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다시 쏟아지는 졸음에 몸을 눕히고 눈을 감았다. 주변은 금방 어두워졌다. 정신은 또 다시 잠식되었다.

 "……야, 오이카와. 오이카와 토오루!"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누군가의 부름은 다시 귓가를 간질였다.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자 신경이 곤두섰다. 상대는 오이카와를 깨우려고 그의 손을 잡았다. 익숙하지 않은 감촉에 팔이 경련했다. 오이카와가 애써 눈을 뜨자 시야에 들어온 건, 손을 잡고 있는 선배의 뻔뻔한 낯짝이었다. 순간 그 간의 서러움이 치솟았으며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랐으나, 손이 저 상태라 몸을 움직일 수 없는 탓에 가만히 누워 화를 삭일 수밖에 없었다. 오이카와는 팔꿈치로 간신히 자신의 몸을 지탱해 일어섰다. 침대에 있는 기계로 올라오고 싶었으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버튼을 누를 수가 없었다. 애달프게 시선을 외면하고 있는 선배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는 까닭이었다. 속으로는 이를 빠득빠득 갈면서도 얼굴에는 애써 미소를 지어보였다. 선배는 미안하다는 한마디를 무심하게 내뱉고선, 창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이카와는 힘을 주지도 못하는 손에 살며시 주먹을 쥐었다. 다시 뼈마디에 통증이 느껴졌다. 선배는 아마 이 미묘한 움직임을 눈치 채지 못했으리라. 평소에도 무관심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인지 단번에 움직임을 알아차리고선, 창가로 돌리고 있던 시선을 다시 마주했다. 여전히 그의 눈은, 냉동 창고에 처박힌 동태눈처럼 흐릿했다.

 "사고였습니다. 그러니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선배님도 코트에 나가고 싶어 했지 않습니까?"

 "……."

 "아, 당신의 그 짓을 받아줄 사람이 없어서 그런 겁니까?"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분명 아픈 환자에게 손을 올리긴 했지만 차마 때릴 순 없었을 것이다. 아마 마음속으로 이놈을 때릴지 말지에 대한 내적갈등을 겪었을지도 모르겠다. 오이카와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을 들어올렸다. 보기에도 앙상하게 마른 손가락을 조심히 접었다. 말려 들어가는 마디가 퍽석하게 부서지는 느낌이었다.

 "이 손은, 10년간 코트 위에서 썩혀왔습니다. 애초에 이 손은 배구 밖에 모르는 손이었단 말입니다. 당신이 가르쳐 준 그 짓 빼곤, 이제 아무 것도 할 수 없단 말이죠. 아아, 당신이 생각하는 그 짓도 못하겠네요. 아쉽겠네. 근데 그건 압니까? 이거 다 당신이 자초한 일이야."

 "내가 그랬다는 증거 있어?"

 "선배가 직접 하지는 않으셨죠. 하지만 당신 때문에 선수 생활도 끝이란 말입니다."

 "치료 끝나고 다시 돌아오면…."

 "시합이 애들 장난입니까? 공백이란 것도 무시할 수 없단 말입니다."

 솔직히 조금은 기대했다. 다시 배구 선수로 복귀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가 어렸다. 그래서 치료가 끝나면, 주전 세터로 팀을 이끌어 나갈 선배에게서 다시 주전 자리를 받아오고, 반드시 밟아 주리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오이카와 씨. 당분간은 손을 쓰지 않도록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애써 뼈를 붙여놨는데, 다시 수술하고 싶지 않으시다면 가만히 놔두십시오. 그리고,"

 "그리고?"

 "선수 생활은 은퇴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손 상태가 매우 안 좋습니다. 거기서 연습으로 손을 혹사시키면 수술은커녕 손을 못 쓰게 될 수도 있으니까."

 청천벽력인 소리였다. 다신 손을 쓸 수 없을 수도 있다고 했다. 깐깐하게 생긴 의사는 회진하던 도중이었으므로 다른 환자를 진료하러 나갔고, 오이카와의 손을 붙잡고 있던 여 간호사들도 재빨리 따라 나갔다. 남은 건, 감독님과 선배뿐이었다. 오이카와는 자신의 손을 매만지던 여 간호사들의 감촉을 곱씹었다. 그러다가 선배와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반반한 낯짝이었으나 흐릿한 눈빛사이에 비친 제 모습과 견줄 만큼은 아니었다. 오이카와는 다시 얼굴에 미소를 띠며 감독님을 불렀다.

 "감독님. 아무래도 이 손으로 시합에 나가긴 힘들 것 같으니까, 은퇴하겠습니다."

 "오이카와."

 "죄송합니다, 감독님."

 감독님께선 아무 말 없이 오이카와의 손을 쓰다듬었다.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으나, 마음속에서 끓어오른 아쉬움은 여전히 들끓고 있었다. 이게 전부 다 그 사람 때문인데, 앞에 있는데도 화낼 수 없는 이 상황이 빨리 지나가길 빌었다. 그런 희망은 무색하게도 깨어진지 오래지만.

 선배는 다시 그 뻔뻔한 얼굴로 돌아와선 본성을 숨겼다. 어디까지나 착한 선배이자 후배 세터에게 주전 자리를 빼앗긴 불쌍한 사람으로 살았으니까. 하지만 연기는 거기서 그쳐야 했다. 굳이 그 작은 자존심 하나 지키겠다고 후배에게 역겨운 짓을 시키는 건, 짐승만도 못한 짓이었다. 정작 제 손을 그렇게 만들어 놓은 건, 당신이면서. 이제 와서 괜찮냐는 애정 어린 관심을 보여주는 이유는 무엇인가. 다 지나간 일을 가지고 이렇게 되새기는 것도 이제 진절머리가 났다.

 "오이카와. 그동안 수고했어."

 분명 위로의 말이었으나 그의 얼굴을 마주하니 결코 그렇게 들리지는 않았다. 오이카와는 말없이 웃어보였다. 입 근처에 살짝 걸린 미소가 흡족스러웠는지 선배는 감독님과 함께 병실을 나섰다. 오이카와는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씨가 쨍했으며, 불어오는 바람은 겨울답게 서늘했다. 오이카와는 다시 그 고통-차가운 쇳덩이가 들락날락거리는 끔찍한 수술-을 겪을 순 없다며 다시 누워 눈을 감았다. 씁쓸함에 눈물이 떨어졌으나 그마저도 메말라 비틀어졌다. 볼까지 흘러내린 눈물이 목을 타고 침대 시트로 떨어졌다. 작게 새겨진 흔적을 눈으로 훑으며, 가까이 흩어지던 산만한 시야를 애써 한군데로 모으고선 눈을 감았다. 눈물은 증오감에 뜨거웠다.

 잠은 들었으나 정신은 깨어있던 터라 감독님이 다시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그는 오이카와에게로 가서 한 번 지긋이 눈길을 주더니 다시 병실을 나갔다. 뒤 따라 왔던 선배도, 그 작게 찢어진 눈으로 침대를 응시하고선, 살며시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돌아갔다. 오이카와는 두 사람이 나간 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명확하게 귓가에 울릴 적에, 그 때 비로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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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후로 다른 동료라든가 대학 동기가 찾아오기도 했으나 다들 괜찮냐는 물음에 그쳤다. 매주 한 번씩 매니저가 찾아왔고, 가끔씩 시간 날 때마다 감독님과 선배가 찾아왔다. 입원 기간 사이에 취재진들도 몇몇 찾아와선 기삿거리를 갖고 돌아갔다. 그 사이에 기자회견도 한 번 있었고, 도중에 은퇴를 선언했다. 더 이상, 선수생활을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모두 제 부주의인 탓이니 죄송하다는 둥. 다시 한 번 열심히 응원해 주신 국민 여러분들께 사과드린다고. 정리되지 않은 언어를 내뱉자 분주하게 움직이는 취재진들 사이로 마이크가 불쑥 튀어나왔다. 여러 기자들 사이로 껴있는 키 작은 남성기자가 제 얼굴 가까이로 마이크를 들이대자, 예상치 못한 행동에 당황하기에 앞서 그에게서 질문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은퇴 후엔 어떤 일을 하실 예정인지, 혹은 다시 선수활동을 재개할 수 있을까에 관한 터무니없는 질문을. 하지만 준비되지 않은 질문이 돌아오자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입을 열기도 전에 경호원들로 부터 제지당하긴 했지만,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는 그를 보자 조금 미안하다는 생각도 없지 않아 들었다.

 퇴원하기 일주일 전쯤에는 이와이즈미가 찾아왔다.

 "너! 어떻게 된 거야."

 "미안, 너부터 찾았어야 했는데. 근황이 없어서."

 "손은."

 "보시다시피. 멀쩡해."

 전혀 멀쩡해 보이지 않는 손을 들어 보이며 웃어 보이는 오이카와의 얼굴에 괴리감이 피어올랐으나,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분명 억울함을 토로하지 못하는 친우의 고충을 아는 탓이리라.

 "기자회견도 했고……."

 "이 손도 그 새끼가 한 짓이냐?"

 "아냐 이건 그냥 내 부주의로…신경 쓰지 마, 이와쨩."

 유일하게 선배의 악행을 아는 이와이즈미였으나, 그도 또한 울분이 터져 제대로 대화를 할 수가 없었다. 이와이즈미는 거의 매일 병실에 틀어 박혀있었다. 하루는 이와이즈미에게 회사는 안 가냐고 묻자 돌아오는 대답은 생각치도 못한 것이었다.

 "이와쨩, 회사는 안 가?"

 "너 나두고 갈 수 있겠냐. 손도 이 꼴이라서 아무것도 못하는 놈인데. 내가 없으면 너, 시도 때도 없이 간호사들 호출해서 부려먹을 거 아냐. 그 꼴 보기 싫어서 온다, 왜."

 "질투했어?"

 "아니거든."

 쉬는 거 아니니까 걱정 마. 잠깐 점심시간에만 보러 오는 거니까. 너 또 다치면 큰일나잖냐, 얼빵한 놈아.

 이와이즈미의 장난스런 말투에 그만 피식하고 웃음이 났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를 보면서 진심어린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곧 손도 나아서 이제는 병원에 안 와도 될 것 같다는 아쉬운 말 한마디를 꺼내기까지에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이와이즈미는 무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이제 너 같은 놈의 병 수발을 안 들어도 되니까 기쁘다는 둥의 의미 없는 말을 내뱉으면서,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지만 이내 그는 퇴원하면 자신의 집으로 오라는 초대와 함께 다시 회사로 향했다. 병실 문이 드르륵 열리고, 그가 나가면서 다시 조용히 닫히는 문을 바라보며, 외롭게 텅 빈 병실을 한 번 둘러보았다. 가슴 한 켠이 아릿한 정적으로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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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날, 퇴원 수속을 밟고 집으로 돌아와서 그대로 침대에서 뻗었다. 공식적인 발표와 두 번째 기자회견이 어제 이뤄졌으므로, 어느 채널로 돌려도 온통 오이카와의 은퇴기사 뿐이었다. 오이카와는 들고 있던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전원을 끄자 화면은 빛을 흡수했다. 그리고 방안에는 어두운 정적이 흘렀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났고, 제 기사가 잠잠해질 즈음에 TV를 켰을 땐 배구경기가 한창이었다. 항상 벤치에 앉아 있던 선배는 코트로 나갔고, 그는 굉장히 큰 성과를 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오이카와의 얼굴에 씁쓸함이 번졌다.

 팔은 분명 다 나았으나 뭔가 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이대로 집 안에만 처박혀 있으면 외로움에 정신이 이상해질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오이카와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향했다. 텁텁한 목을 물로 적시고 난 뒤, 식탁 위에 있던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일자리, 찾아볼까. 오이카와는 곧장 구인광고 사이트로 들어가 자신이 할 만한 일이 있는가를 우선 찾아봤다. 배구 코치가 제일 적당할 텐데. 그렇지만 아직까지 손목은 완치가 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굳이 그런 짓을 저질렀다가 이와이즈미에게 한 대 얻어맞을 생각은 없었기에 바로 창을 껐다. 이렇게까지 무능력했던가. 배구에 인생을 건 대가치고는 너무나 비약했다. 곧이어 다른 직장을 알아봤으나 다른 조건이 걸림돌이었다. 결론적으로, 쓸모없는 인간이었단 게다. 오이카와는 한숨을 쉬며 곰곰이 생각했다. 어렸을 적부터 주변 사람들이 추천하기로는, 토오루는 아무래도 얼굴이 잘 생겼으니까 가수-혹은 배우-는 어떠냐고 많이 들어왔으나 반반한 얼굴과 달리 그런 쪽엔 재능이 없었다. 하지만 뭐든 잡고 봐야했다. 오이카와는 며칠 전 들어온 드라마 섭외가 떠올라 담당 감독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오디션을 보러 방송국으로 나오란 간단한 문자가 왔다. 오이카와가 오지 않을 시를 대비한 대타도 있었고, 아직 주연도 정해지지 않았으나 감독님은 오이카와를 주연으로 쓰고 싶다고 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드라마의 주연이 배구 선수였고, 전반적으로 경험이 있는 오이카와가 주연을 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한 감독님께선 그에게 섭외 문자를 보냈으나 아직까지 답이 없었던 탓이었다. 하지만 일부 팬들로 부터 일어난 논란 중에는 아직까지 오이카와의 손이 완치되지 않은 상태라 그의 건강이 걱정된다는 등의 의견도 있었다. 담당 작가님께선 오이카와가 맡게 될 작중 인물은 프로가 아니라 아마추어고, 또 그런 미숙한 선수가 나아가는 과정을 그렸으므로 오이카와가 아니라 다른 배우로 써도 무방할 것 같다는 의견이 나왔으나 감독님께선 꽤나 고민하는 눈치였다. 아마 전화를 받은 그 시점에서 그는 결정을 끝냈을지도 모른다.

 오이카와는 준비를 끝마친 말끔한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선수 생활하기 전에도 몇 번 입지 않은 정장을 이제야 입다니. 오이카와는 불편한 듯 몸을 움직거리면서 차를 타고 방송국으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그가 찾은 곳은 2층 회의실이었다. 다들 배역 오디션을 보러 온 배우들로 가득 차있었는데 그 중에는 모델이나 가수도 적지 않게 보였다. 그런 쟁쟁한 인간들 사이에서 제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는지. 한편으론 의심이 되면서도 괜스레 기대감이 커졌다. 혹여나 자신이 주연으로 캐스팅 된다면 그거야말로 인생역전 아니겠는가. 오이카와는 관계자의 지시에 따라 회의실로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오이카와 토오루입니다."

 간단한 면접과 연기로 심사를 했는데, 애석하게도 오이카와는 연기를 그다지 잘하는 편이 아니었다. 오이카와의 연기력을 본 감독님께선 씁쓸한 미소를 한껏 얼굴에 머금고는, 아쉽다는 형식적인 인사와 함께 그를 돌려보냈다. 무거운 발걸음을 조심히 떼어내자 그간의 긴장이 전부 발끝으로 쏠린 것인지 저릿함이 몰려들어왔다. 그래도 한 걸음씩, 비장한 발걸음을 내딛으며 자신의 연기력에 대해 자책하고 있을 즈음, 아무 생각 없이 밖으로 나가려 문손잡이를 붙잡았는데 무슨 일인지 제 몸이 앞으로 쏠려나갔다. 그리고 누군가를 향해 부딪쳤다. 그가 제 몸을 감쌌기에 넘어지는 꼴은 면했지만, 뭔가 찝찝한 기분이 온 몸을 스멀스멀 기어 다녔다. 뭔가 했더니 그가 들고 있던 커피가 흰 셔츠에 묻어있었다. 거의 새 옷인데, 아쉽지만 오이카와는 그런 거에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하루 빨리 다른 일자리를 알아봐야했다.

 "아, 이런."

 그는 옷을 보며 난처해하더니 오이카와에게 되물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저희 가게로 가셔서 옷을 새로 맞추시는 건 어떠신지. 제 잘못인데, 이렇게라도 해드려야 할 것 같아서."

 "그, 옷이요?"

 "예. 디자이너, 마츠카와 잇세이입니다. 도쿄의 작은 상점에서 맞춤 정장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뭔가 낌새가 안 좋은걸 느끼긴 했지만, 우연이 이토록 틀어지게 된 계기는 단지 그와의 만남뿐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보다 놀라운 건, 그 사람에게 살짝 마음이 기울었다는 일일까. 첫 만남에 이토록 뛰는 심장이라니. 오이카와는 고장 난 제 심장을 계속 멈추려고 노력하며 그의 뒤를 따라 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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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목에서 핏물이 떨어질 때면 내 온갖 신경이 마구 치솟아 오르면서 막, 막 이상한 감정이 차올라."

 당신이 제게 했던 말은 어느새 찢어진 붉은 입술에 먹혀 짙게 터져나오는 호흡에 갈라졌다. 그는 제게서 얻어내려고 하는 게 적지 않았으나 이토록 어이없게 단번에 저를 잡아먹으려 했던가? 그의 손길이 제 턱선을 따라 가슴 팍으로 내려가더니 어느새 허리에 다다랐다. 그는 끈적한 손길로 제 허리를 감싸더니 또 다시 제 목부근에 머리를 박고선 흐르는 핏물을 조심스레 핥아먹고 있었다.

 "당신 피는 야해서 좋아. 최근에 먹은 피 중에 당신 게 제일 좋았단 말이지."
 "잔말말고, 빨리 드시고 꺼지시죠."
 "너무 야박하네. 말했잖아. 이제 당신 피 말고는 먹을 피가 없다고. 다른 피는 다 더러워 보여서 말이지."
 "그냥 저를 죽이시고 피나 실컷 먹으신 뒤에 버리시는게,"
 "너를? 너를 죽이란 말이야? 대체 왜? 몇 일만 쉬면 새로운 피가 샘솟을 텐데, 내가 뭘 위해서 그래야하지? 한 순간의 행복을 위해 내가 당신을 죽여야 한단 말인가?"
 "아님 말고요."

 당신은 아마 제 피가 탐나기 때문에 내 곁에 머무르는 거라고 생각했다. 갈 곳 없는 나를 붙잡아 집을 내어주었고, 음식도 건네주었다. 나는 당신에게 피를 내어주는 것으로 삶을 연명하고 있었다. 그는 꽤나 친절했다. 고작 피를 먹겠다고 충분한 음식을 매일 내어준다든가, 다정하게 제 마음을 안정시키는 등의 행동은 오히려 연인같이 보이기도 했다. 정작 그는 아무 생각도 없어보였지만.

 "저기요, 뱀파이어 씨?"

 나는 아직 그의 이름을 몰랐다. 딱히 대체할 호칭도 찾지 못했기에 뱀파이어라 불렀다. 언젠가 그가 이 곳을 비우는 날이 온다면 그 때는 이 빌어먹을 저택을 빠져나가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몇 주 동안 그는 나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꼼짝없이 뱀파이어에게 잡혀있어야 했다.

 "왜 그러지? 부탁이라도 있는건가?"
 "그건 아니지만, 언제까지 우리가 이렇게 있어야 하죠?"
 "아, 밖에 나가고 싶은건가."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한 손으로 자신의 입술을 훑으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어쩌면 들리지도 않을 정도의 작은 소리였기에 그가 뭐라 하는지는 하나도 듣지 못했으므로, 안타깝지만 접어두는게 나을 듯 싶었다.

 "아니에요. 그건 아닌데."
 "그럼?"
 "오늘이 몇 일이죠?"
 "9월 25일."

 예? 잘못들은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9월 25일이면 그를 처음 골목에서 마주했을 때와 같은 날짜였다. 혹여 1년이 지난 건지 물어봤으나 확실히 그 날이었다. 시간이 멈춰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다시는 이 곳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는게 아닐까, 하고도 생각했다. 여전히 그는 허기짐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일그러지던 제 얼굴을 보던 그의 표정이 장난기 가득한 미소로 번졌다. 그러더니 양껏 걱정을 껴안은 제 양 뺨에 손을 가져다 대고선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감촉에 놀라기에 앞서, 그의 입술이 움직거리는 종착지를 찾아가니 더 이상 놀랄 수는 없었다.

 "거짓말이야. 뭐 그리 실망해? 오늘 당신이 들어오고 나서 딱 2주 지났어."
 "그, 그렇습니까."

 농담은 되도록 하지 말아주시죠. 당하는 나는 심장 떨리니까. 또 얼굴은 왜 저렇게 생겼는지 심장에 무리가 갈만한 외모라서 계속 제 심장은 열심히 뛰고 있다. 냉철한 저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은 여전히 싱글거리며 능글맞게 대꾸하고 있지만.

 "당신, 근데 내 이름 안 궁금해?"

 왜 안 물어보는거야? 그는 귓가에 대고 제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별로. 피만 주다가 나갈꺼니까요."
 "아냐, 기억해두는 게 좋아. 당신이 언제고 나를 마음 속으로 기억할 때마다 이름을 부른다면, 그 때라도 나는 당신을 이 저택으로 다시 데리고 올 생각이거든."

 당신도 아마 내가 그리워질껄? 능글맞게 웃는 그에게서 달아나려고 하자 그는 제 몸을 벽 쪽으로 밀치고선, 또 다시 입을 맞춰왔다. 평소보다도 더 격렬한 키스였다. 어쩌면 그간 했던 접문 중에서도 가장 여운이 길게 남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터진 입술에서 비릿한 피맛이 감돌았다. 그는 제 피를 보고도 달려들지 않았다.

 "마츠카와 잇세이. 기억해두는게 좋을거야. 그럼, 잘가. 오이카와."

 그는 미련 없이 제 몸을 문 밖으로 밀쳐냈다. 눈을 뜨니 전에 그와 만났던 골목이었다. 휴대폰 액정이 나타내고 있는 시간은 오후 9시. 날짜는, 9월 25일이었다. 한 순간에 몰려드는 무력감과 황당함이 머릿속으로 가득차고 있을 즈음, 그의 이름이 생각났다. 마츠카와 잇세이. 아무 감정도 들지도 않았고, 어떤 느낌이 들지도 않았다. 그냥 매정하게 말하자면 허상이었다.

 나는 당신을 본 적이 없어. 언제까지고 나는 당신과 아무런 연이 없는 평범한 인간일테고, 당신은 그저 잠시 내가 골목에서 빈혈이 나서 까무룩 쓰러진 차에 제 꿈 속에 나타난 무의식일 뿐이다. 난 아직 당신을 기억하고 싶지 않다.
 아니, 그 언젠가 내가 당신을 떠올린다 하더라도 다시 만날 마음은 없는거야.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나를 버리는 사람하고는 다시 만날 생각이 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마츠카와를 다시 본 건, 그로 부터 이틀 후였다.



 "오이카와?"
 "으음, 누구?"

 깨어나보니 그의 저택 안이었다. 마츠카와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어쩌면 환청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잠들려고 했으나 맞닿아오는 그의 손길에 이는 꿈이 아니라고 직감했다.

 그의 선명한 숨소리가 제 귓가로 파고 들고 있었다. 얼굴을 제 목에 파묻은채로 짐승처럼 피를 갈망하다가 결국 유혹을 참지 못하고 푹, 이를 박았다.
 피가 흐르는 감촉에 그의 머리를 끌어 안고선 고통을 내뱉었다. 어느새 노곤해진 몸은 그의 손이 지탱하고 있었고, 그는 제 몸을 잡아선 침대에 다시 눕혀주었다.

 "봐. 넌 다시 올거라고 했지? 이제 벗어날 수 없어."
 "이건 꿈입니다. 그래 이건 꿈이겠지."
 "꿈? 꿈 같은 소리 하네. 넌 이제 내 품에서 못 벗어나, 오이카와."

 저렇게 말하는 재수없는 놈에게 화가 나야하는게 분명한데 피를 빨려서 그런지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아아, 나는 탄식했다. 그의 몸을 껴안으며, 피의 저주에 잠식되어가면서. 점차 감정의 몰락에 처연히 대처하며.

 감정회로의 손상이 일어났다. 억지로 맞지 않는 곳에 끼워넣었다. 그럴 수록 이상하게 당신이 제 눈에 어른거렸다. 정말 고장난 걸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이 현실이 꿈이 아니길 간절히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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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n after you

 

마츠×오이


*각애 외전


 그 날은, 평소와 다르게 꽤나 고요했던 날이었으나 또, 평소와 다르게 다사다난 했던 날이었다. 하늘은 여느날과 같이 청명한 빛을 머금고 있었고, 구름 한 점 없이 내리쬐는 햇빛은 무더위에 적합했다. 하지만 여전히 더위에 찌들어 건물 안에 처박혀 있는 제 신세는 자유롭지 못했다. 그의 가호아래 밖으로 나다니지도 못하고 에어컨 바람이나 쐬는 신세라니. 누가 들으면 부럽겠다고 구미가 도는 제안일지도 모르겠으나, 별로 달갑지만은 않는 말이다. 아마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왔다면, 그가 과연 이렇게까지 편의를 제공해줄 의향조차 있었을지도 의문이다. 아아, 나는 탄식했다. 부디 나를 편히 놓아줬음 좋으려만. 애석하게도 제 바람은 이미 그의 입맞춤에 묻혀버린지 오래였다. 이제는 맨정신으로 그를 마주하는 일도 힘들었다. 죽여달라고 애원해도 그가 들고있는 총으로 제 몸만 죽이고 정신은 살려놓을 놈이다. 나는 체념한 상태로 차 안으로 들어오는 그를 맞이했다.

 "토오루"
 "무슨 일이시죠, 보스."
 "넥타이가 삐뚤어졌어. 잠깐 나와, 다시 매줄게."

 그는 한 손으로 나를 차 안에서 끄집어내더니 능숙한 손길로 넥타이를 매기 시작했다. 그의 손길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끈적해지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으나 금새 그는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뒷좌석에 올라탔다. 그는 항상 반듯한 모습으로 회사에 가곤 했으므로, 흠잡을데가 없었지만 나는 익숙하지 않은 옷차림을 애써 정리하며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굳이 일도 하지 않는 내가 정장을 입을 이유는 없었던 것 같지만,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좀 더 신경쓰는 듯한 분주한 모습이었다. 그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조금 제 모습이 초라해보이기 그지없었지만 그도 그뿐이었다.

 "그리고 보스는 조금 딱딱하지 않아? 네가 조직원도 아니고, 굳이 그런 호칭으로 날 부를 필요는 없잖아."
 "아직은 어색하니까요"
 "어색하긴, 어제까지만 해도 반말 찍찍 써대는 사이 아니었나?"
 "죄송합니다. 그땐 제가 미쳤나 보,"
 "그러지 말고, 기분좋게 갔다 올테니까 내 이름 불러줘. 오늘은 그닥 내가 좋아하지 않는 손님이 올 예정이라."

 좋아하지 않으면 거래를 잡지 않으면 될 것 아닌가.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외면하고선, 입도 꿈적 안하고 회사로 가려고 했다. 그의 긴 손가락이 제 볼을 살짝 찔렀다. 어리벙벙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피식 웃으며 제 손을 붙잡았다. 그의 끈적한 숨이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 들었다. 그는 제 의도를 파악했는지 이름을 불러주지 않으면 이 손을 놓지 않겠다는 듯, 계속해서 제 옆으로 달라붙어왔다. 그 사이 이미 차는 회사 앞에 도착해 있었다. 그는 아쉽다는 듯 제 손을 놓고, 차에서 내렸다. 그는 제 손을 잡았고, 나는 그의 에스코트 아래 차에서 내렸다. 오늘은 왠일인지 어디로 가라는 그의 명령이 없었고, 그는 계속해서 제 손을 붙잡고 있었다. 오늘은 또 무슨 속셈이지. 그의 손은 여전히 끈적하게 제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고 있었다. 약간 소름이 돋는 터라 잘게 손이 떨렸지만, 그는 별로 개의치 않는 듯 했다.
 오늘은 그도 사장실로 향했다. 평소 같았으면 회의실이나 다른 장소로 가서 거래를 주고 받았을텐데, 오늘은 꽤나 중요한 사람과 거래를 하는 것 같았다. 잘 모르겠지만 감이 그랬다. 그런데 이제와서 그의 이야길 꺼내는 이유가 왠지. 사장실에 들어서자 마자 그는 제게 이런 이야길 꺼내왔다.

 "난 가끔 당신이 떠날까봐 무서워. 당신 마음이 아직 그 쪽에 있거든. 그 놈,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해?"
 "…잘 살고 있어?"
 "아쉽지만, 죽었다는군."
 "개만도 못한 새끼!"
 "입도 적당히 놀려. 그 입 잘라버리기 전에."
 "씹…읍."

 제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잇새로 흘러나온 짧은 외침은 그의 눈빛에 사그라들었다. 그는 제 귀에 대고 낮은 톤의 목소리로 속삭였다. 놀라지 말고 들어, 토오루. 오늘 그가 이 곳으로 올거야. 하지만 기대는 하지 않는게 좋아. 그는 살아있지만, 너를 알고 있는 이와이즈미 하지메는 죽었거든. 그는 이미 너를 기억에서 지웠을테니까.

 조금 멍한 상태로 그를 바라보자 그는 별 말없이 사장실을 떠났다. 같이 올라온 건, 이 말을 하기 위해서였나. 그럼 분명 그가 좋아하지 않는 손님이란 건, 이와쨩을 의미할테다. 하지만 제가 회의실로 간다고 해서 그를 찾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고, 아마 도착하기도 전에 그의 손길에 붙잡혀 다시 그의 집에 처박힐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조용히 기다렸다 그에게 경과를 물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수확일게다. 이와쨩이 살아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할텐데.
 다리에 힘이 풀려주저 앉았다. 정신없이 멍하니 10분 정도를 그렇게 있었을까. 사장실의 문이 열리는게 들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비서실로 들어오는 문이 아니라, 간이로 만들어 놓은 작은 문으로 들어 온 남자는 이와이즈미 하지메였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에게로 달려갔고, 그 또한 제 얼굴을 보고선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이와이즈미는 급하게 제 팔목을 잡아채고선 창문을 깨고 뛰어내렸다. 얘가 약을 먹더니 미쳤나, 하고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다행히도 앞 건물과 높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아서 간신히 옥상에 착지할 수 있었다. 그의 회사를 바라보니, 사장실에서 제 모습을 응시하는 마츠카와의 흔적이 여실하게 깨진 창문사이로 드러났지만, 또한 그 눈빛이 살벌하기 그지 없었으나 나는 도망치기 바빴다. 이제 그의 손에 붙잡혀 사는 건, 치가 떨리는 제안이었다.

 "오이카와, 그 동안 잘 있었어?"
 "응. 이와쨩도 별 일 없었지?"
 "저 새끼가 준 마약 참는 것 빼곤 별로."

 그래도 가끔 발작은 해서 한 알씩 먹어줘야 해. 저 새끼가 뒤쫓아 오진 않겠지? 다른 마약밀수업자를 알아봐야 하나.
 이와이즈미는 정리되지 않은 언어를 내뱉었고, 달리던 도중 그는 무언가가 목에 걸렸는지 한손으로 목을 감싸며 , 한 손으로 주먹을 쥐고 가슴을 연신 쳤다. 답답한 가슴을 부여잡으며 도시 한복판을 달리고 있을 즈음이었다. 어디선가 미약하게 피냄새가 났다. 옆에서 나는 냄새였다. 조심스레 고개를 돌리자 이와이즈미는 켁켁대며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이는 핏물에 물들었고, 나는 조심스레 그에게 다가가서 등을 두들겨 주었다.
 일어날 수 있겠어? 나는 그를 붙잡아 일단 골목으로 끌고 갔다. 이대로 있다가 경찰에게 들켜 병원에 간다해도 그의 신분 -신용불량자에 마약중독- 이 들킬 수 있었으므로 어떻게 보면 그 사람까지 연결될 수 있었기에, 복잡한 일은 피하고 싶었다. 나는 조심스레 옆의 골목으로 그를 데리고 갔다.

 그 순간, 그에게로 총탄하나가 날아들었다. 토해내던 입 속에서 울컥하고 핏물이 솟구쳤다. 가슴을 뚫고 지나간 총탄은 제 앞에 떨어졌고, 눈 밑이 벌겋게 충혈된 이와이즈미의 사체는 제 앞으로 고꾸라졌다. 오이카와는 쓰러진 이와이즈미를 한번 즈윽 훑고선, 다시 고개를 들어 제 앞에 서있는 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분명, 제가 알고있는 이였다. 마츠카와 잇세이. 벗어나고 싶었던 족쇄와도 같은 사람.

 "도대체 왜 죽인거야? 살려 놨으면 좋았을텐데! 살아있었는데!"
 "마약 중독이랬지? 그 새끼, 널 데려 가서 장기매매 업자에게 넘겨줄 심산이었던 것 같은데. 아님 네 장기를 자기 몸에 이식하려는 생각도 했었겠지. 약 때문에 많이 망가졌거든."
 "그럼…."
 "너 죽일 생각은 없으니까, 그냥 나한테로 와. 도망치지 말고."

 갑자기 제 자신이 한심해졌다.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 그를 밀어내려고 했던가. 아아, 마츠카와! 나는 조심스레 그의 손을 붙잡았다. 죄송해요, 다시는 도망 안 칠게요. 믿을 사람 없다는 걸 다시 한 번 절실히 깨닫고 나서는 더 이상 도망칠 여력도 없다. 나는 그의 사죄의 의미로 그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으나, 그가 제게 제안한 것은 터무니 없는 것이었다.

 "이름, 불러줘."

 아직도 이름에 집착하고 있는 걸까. 나는 별 수 없다는 듯, 살며시 미소를 흘기며 그에게 답했다.

 "잇세이."
 "좋아. 토오루. 이제 밤에도 그 상태로 울어줘."

 뭔가 이상한 방향으로 대화가 흘러가고 있음에 틀림없었지만, 나는 무턱대고 끄덕였다. 분명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데 남아있던 여유가 다 사라진 탓이리라. 나는 그에게 안겨있는 채로 그에게 말했다. 좋아합니다. 이제는 진짜 도망치지 않을테니까, 나 미워하지 말아주세요.
 과연 그런 말로 그의 마음이 풀릴 지는 의문이었지만, 그를 이름으로 부르는 건 조금 보류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마피아 보스 이름을 막 부르는 건, 뒤가 조금 찝찝했다. 그래서 그냥 달링을 호칭으로 정하고 마무리했다. 그는 제가 달링하고 부를 때마다 조금 부끄러워 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오히려 즐기는 마음으로 부르고 있다.

 당신이 온전히 제 마음 속으로 들어올 그 날까지 난 당신에게 고마워하고 사랑할테다. 당신이 내 뒤를 뒤쫓듯, 나도 당신의 마음을 뒤쫓으며. 이제는 어느 누구의 마음에도 현혹되지 않고, 오로지 당신만을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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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ly Holiday

 

마츠×오이 

* 각애 스핀오프



 "아아-, 더워."

 더위에 물든 건물은 창문으로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으며, 방 안에 있는 에어컨 조차도 주인이 없는 동안에는 작동이 되지 않았다. 차라리 비서실에 가서 얼음물이라도 달라고 해볼까. 그러기엔 저번 일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 것만 같아서 차마 사장실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작은 선풍기가 책상 위에 놓여져 있었기에 그거라도 틀고선 작은 위안을 삼고 있었다.
 그는 오늘도 타이밍 좋게 거래를 마치고 돌아왔다. 꽤 좋은 결과를 가지고 돌아온 모양이었다. 그는 소규모 회사의 사장인데 (사실 하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가끔씩 오는 손님들과 거래만 하고, 주로 마약류나 총기등을 거래하는 '마피아'라는 사실은 극히 소수만 알고있는 사실이다. 아마 분홍색 머리인 그 비서도 아마 이러한 사실은 모를 것이다.

 그는 책상앞에 있는 선풍기에 얼굴을 대고 투덜대는 제 얼굴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며 말을 건넸다. 그리고 서랍에서 에어컨 리모컨을 꺼내더니 무심하게 전원을 키고선 다시 집어넣었다. 그냥 틀어놓고 갈 것이지. 몇 시간 동안 더위에 방치시켜 놓은 그가 조금 미워질 뻔 했지만, 그 다음 그의 말에 누그러졌다.

 "영화보러 갈래?"
 "영화관?"
 "응."

 월척이다. 최근에 꼭 보고 싶었던 영화가 있었는데 집에서는 영화를 본다해도 그가 계속 달라붙어와서 힘들터였고, 최근에 바깥에 나가지 못해 많이 수척해 진 것 같았는데 그런 기분도 모조리 다 날려버릴 만한 제안이었다. 그 달콤한 제안을 어찌 거절할 수 있을까. 나는 그가 말을 바꿀세라 나는  재빨리 가겠다고 했다. 어딘가 찝찝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설마, 영화관을 통채로 빌린다거나...?"
 "그런짓은 안 해. 가서 영화 보려는거 아냐?"
 "아님 나 혼자 갔다 올...까?"
 "같이 가. 안 달라붙을게."

 그렇다면 답은 간단하다. 좋아, 가자. 더운데 잘됐다. 하지만 아직까지 괴리감을 떨쳐버리진 못했다. 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채로 다시 그의 손에 붙잡혀 영화관을 가야 했다. 그래도 나갈 수 있다는 자유에 사로잡혀 별 말 없이 그를 따랐다.

 "자리는, 각자 떨어져서 앉,"
 "이미 예매했어."
 "팝콘은?"
 "가서 사줄게."

 휴일이랍시고 거래도 빨리 끝내고 오셨댄다. 그럼 그가 원하는 대로 해줘야겠지. 나는 잔말않고 그를 따라 가기로 했다. 한 손엔 팝콘을 들고, 한 손엔 콜라를 들고 그를 따라간 2관에서는, 아직까지 광고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평일 오전이라 그런지 사람도 별로 많이 없는 것 같았다. 설마 이런 곳에서 이상한 짓 하려는 건 아니겠지, 하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긴장감을 놓을 순 없었다.

 "이거, 보고 싶은 거 맞아?"
 "으, 응."
 "꽤, 마니악하네. 이런 거, 좋아해?"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2관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를 찾아가니, 것도 영화관 구석이다. 진짜 어떤 흑심도 없는 것일까. 나는 여전히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그리고 영화보는 내내, 내용에는 집중하지 못하고 무심하게 쓰다듬는 그의 손길을 느끼지 않으려 애써야 했다. 다음부터 내가 그 녀석이랑 영화관에 오나 봐라, 진짜. 그리고 끌려 올테다, 제기랄.

 "그러니까, 이런 외설적인 영화는 집에서 나랑 보는게 좋겠지?"
 "당신이 손으로 만지지만 않았어도..!"
 "느꼈잖아. 응? 기분은 좋았지?"

 그는 능글맞게 웃으며 제 대답을 기다렸으나 나는 부끄러워 고개를 푹 숙인채로 그저 끄덕이기만 할 뿐이었다. 그는 뭔가 생각이 난 듯 제 어깨를 그의 큰 손으로 감싸더니, 말을 이었다.

 "역시 공공장소는 아닌 것 같아. 당신이 느끼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진 않거든. 정 영화가 보고 싶으면 말해. 안 쓰는 건물 하나 매입해서 영화관으로 만들어 놓을게."
 "그냥 집에서 볼게. 미안. 굳이 나오겠다고 고집피워서."

 말이 안 통하는 놈이다. 그냥 제 몸 간수만 잘한다면 별 상관 없을 것 같으니 순순히 그의 요구에 따르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가볍게 그의 입에 키스하고선,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는 옅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휴일이라기엔 조금 어지러운 날이었다. 영화관은 특히 생각치도 못한 일을 당했으나, 나를 위로한답시고 바닷가로 드라이브한건 꽤 기분좋은 느낌이었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닷 바람이 기분좋게 찰랑였다. 그의 차에서 내려 그의 손을 잡고 가볍게 볼에 입맞추며, 그의 집으로 들어간다. 이제는 익숙해진 당신에게 속삭이며.

 "사랑합니다. 이제는 도망 안 가니까, 걱정 안 해도 돼요. 나, 당신을 꽤나 사랑하고 있으니까."
 "그래? 그거 고마운데."

비록 처음은 강제였으나, 지금은 조금 다른 사랑을 속삭이며.


    

 

각애(刻愛)
(부제: 죽을 권리와 살 의무)


 


*나래님 생일 축전))
*마츠×오이(+이와)

 

 

 

 열린 창문 새로 바람이 옅게 불어오고 있었다. 거무죽죽한 안개가 부옇게 흐려오던 오전이었다. 축축한 습기를 머금은 공기는 눅진하게 스며들었다. 허리 부근이 아프다 못해 아리다. 한 손으로 허리를 부여 잡으며 침대에서 일어나니, 그 전날의 기억이 머릿 속을 어지러이 유영했다. 아슬아슬한 기억속에 그와의 접문이 아릿한 기억으로 자리잡았다. 결코, 말하건대 그의 키스는 최악이었다.
오늘에야 말로 죽어버릴테다. 각오는 산산히 부서져 그의 입술에 먹혔다. 어젯밤 죽을 각오를 하고 건물 밖으로 빠져 나가려고 했지만, 보안 장치에 다시 제 방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는 모든 걸 다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새벽이 주변을 가릴 즈음, 제 방으로 찾아와 자고 있는 제 몸을 덮치며 조심스레 키스했다. 입 맞춤은 최악이었다. 혀를 휘감아 오는 그의 입이 제 것을 물어 뜯을 듯이 달려들었다. 솔직히 말해, 못한다기 보단 너무 아팠다. 그가 깨문 제 입이 붉게 부어올랐다.

 "오이카와. 나갈 생각은 하지 않는게 좋을거야."

 그리고 그는 방을 나갔다. 잠시의 접문을 끝내고, 밤이 그리 빨리 흘러가는지도 느끼지 못한채로 잠들었다. 깨어나 보니 해가 이미 중천에 떠있었다. 또한, 제 옷은 갈아입혀져 있는 상태로, 그의 차에 태워져 회사로 가는 중이었다. 아마도 그가 골랐을 수트는 깔끔하게 입혀져 있었고, 그는 유유히 운전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다 왔어. 내려."
 "여긴 뭐하러 왔어? 할 일도 없잖아. 유령회사에서 할 일이 뭐가 있다고."
 "오늘 거래가 있을거야. 중요한 거래니까, 6층에서 조용히 있어."
 "잠깐 시내에 나가는 건 안 돼? 이와쨩만 잠깐 보고 다시 돌아올..."
 "안 돼."
 "내가 억지로 빠져나간다면?"
 "그땐 사지를 절단해 버릴거야."

 그러니까 말로 할 때 들어. 나도 네 사지를 절단하고 싶진 않거든. 아직 제대로 맛도 보지 못했는데 죽어서야 되겠어?
그의 말소리가 이질적으로 흩어졌다. 나는 그를 뒤로 하고 사장실로 향했다. 아마 거래는 회의실에서 이루어질게다. 그는 순순히 뒤를 돌아 회의실로 향했고, 사장실로 가려다가 담배나 한 개비 피우려고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아무 것도 없는 휑한 공간이 자신을 반긴다. 하늘은 오늘따라 흐릿했다.

 이와쨩이 다시 돌아왔으면 좋을텐데. 담배를 피우면서도 그가 떠올랐다. 아마 비흡연자였던 이와이즈미의 호통이 생각났던 탓인지도 모르겠다. 담배는 냄새도 맡기 싫다며 거부하더니, 결국 이런 상태다. 물론 담배 때문에 떠나간 건 아닐지라도, 매한가지다. 그는 내가 싫었던걸까. 담배 끊기는 좀 힘든데. 그가 깔리는게 아파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이와쨩은 나를 마츠카와에게 팔아 넘기고 이 빌어먹을 공간을 나갔다. 그의 감시 아래 있었던 그가, 자유를 되찾고 밖으로 나갔다. 지금이라도 이와쨩이 돌아와서 날 데리고 나가겠다고 와준다면, 난 다시 받아줄 의향이 있다. 이와쨩이 싫다고 해도 나는 그를 붙잡고 나갈게다. 그럴러면 제 몸 값을 지불할 -원래는 이와이즈미의 빚이었다- 돈이 있어야겠지. 애인을 팔아먹고 빚을 갚은 남자에게 줄 수 있는 건, 벌 뿐이다. 마츠카와에게서 벗어난다면, 반드시 그를 만나 그 간의 서러움을 알려주리라.

 무튼 나는 그를 만나고 싶었다. 지금 이 건물에서 뛰어내려 중상을 입는다 해도 -즉사만 아니라면- 그를 볼 수 있다면 나는 뛰어내릴 것이다. 가장 바라는 건, 지금 이와쨩이 내가 있는 곳을 알아내서, 마츠카와가 거래하는 동안에 나를 빼내는 거였다. 하지만 제 기대는 역시나 부서졌다. 정말로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속박되어 사는 것보단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게 낫겠다고, 저 괴물같은 남자에게 잡아먹힐 바엔 세상을 등지는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이젠 생각의 자유도 없는 건가. 그는 거래가 끝났는지 상쾌한 얼굴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저게 이와쨩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허황된 미래를 잠시 상상해 보았다. 하지만 현실은 너무나 일찍 찾아왔다.

 지쳐 쓰러지던 제 손을 잡아 올린 건, 그가 아니었다. 깊은 눈매로 나를 응시하던 남자는, 넘어져 있던 제 몸을 일으켜 세우고선, 뒤에서 나를 꽉 끌어 안았다. 그의 품에 폭하니 파묻힌 제 몸부림은 그의 팔에 간단히 제압되었다. 그는 그 단단한 손으로 제 몸을 끌어 올리고선, 파도처럼 잔잔한, 낮은 톤의 목소리로 제 귀를 현혹시켰다.

 "놔! 난 죽을거라고! 이거 놔!"
 "토오루."

 그의 어두운 목소리가 제 귓가를 스치고, 그의 손은 제 몸을 더 억죄어 온다. 더듬는 그의 손길이 어딘가 모르게 음습하다. 옅게 웃는 그의 웃음소리가 제 귀에 박혔다. 호탕하게 웃는 것도 아니고, 한숨과 가까운 웃음을 흘겼다.

 "이거..., 놔줘."

 태도를 바꾸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에게는 이렇게 접근하는게 빠져 나오기 쉬울 것 같았다. 되도록이면 편히 죽길 원했다. 나는 결정되지 않은 미래에 선뜻 표를 던질만한 용기는 없었다. 그의 말소리가 이질적으로 제 가슴을 찔러온다. 곧 비수가 되어 제 마음을 갈갈이 찢어놓았다.

 "넌 못 죽어. 알잖아? 네 몸은 내가 샀으니까, 네가 독단적으로 움질일 수 있는게 아니란 말이다."
 "보스..."

 나는 최대한 애절하게, 비굴하게 나 자신을 낮추고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의아하다는 듯 나를 내려다 보는 그 눈빛에 서늘함을 담고 있었다.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의 눈에 제가 온전히 파묻히게 된 것이었다. 그를 가까이서 보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이었거니와 그는 처음으로 -느낌이지만- 내 눈을 정확히 쳐다보고는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고개를 돌리니 그의 얼굴이 보였다. 금욕적인 얼굴을 가진 이 남자는, 뇌쇄적인 미소를 흘기며 제 본능을 자극했다. 그것은, 수컷 짐승의 구애 같기도 했고, 혹은 질투에 눈이 먼 남자의 발악같기도 했다. 제 몸을 감싸오는 그의 손길이 야릇한 본능을 지니고 있었다면, 그의 표정만으로는 이미 모든 걸 끝낸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의 압도적인 미소에 나는 조심히 꼬리를 내리고 위협을 느끼면서도 조금은 대담한 손길로 그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는 가소롭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고선, 다시 한 번 제 볼에 입을 맞추었다.

 "틀렸어. 난 네 보스가 아니라 애인이지."
 "미친, 당신이 왜 내 애인이야."
 "몸 맞고 마음 맞으면 애인이지. 아직도 그 녀석한테 미련을 가지고 있는거야? 널 버리고 떠난 놈인데도?"

 갑자기 울화가 치밀었다. 그는 그런 뜻으로 나간게 아닌데. 분명 그는 다시 돌아올거라 믿고 있었다. 그런 믿음을 그는 단 3초의 정적으로 깨뜨려 주었다.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의 침묵은 어느새 바람결에 흩날려온 마냥 다시 스치듯 흘러갔다. 그가 팔을 느슨하게 풀려는게 느껴졌다. 나는 그 틈을 타 어떻게든 안간힘을 썼고, 몸은 빠져나왔을지언정 마지막에 붙잡힌 손목은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부어오른 손목이 아릿했다. 더 세게 쥐어오는 탓에 통증은 더 심해졌다. 점점더 그의 손이 제 것을 쥐고 억죄어 왔다.
나는 있는 힘껏 발악을 했다. 그의 표정이 약간 험악해 졌음을 느꼈지만 개의치 않았다. 나는 당신의 그 잘난 손에 붙잡혀 총으로 맞고 칼로 난도질 당해 처참히 생을 마감하고픈 마음은 없다. 적어도 생의 마지막을 그런식으로 끝낼수는 없다고 하는게 맞겠다.

 그와의 언쟁이 점차 심해지다 못해 극에 다다랐다. 제 목소리는 여전히 공기를 갈랐지만, 그는 평소와 같이 고요한 울림이었다. 나는 목이 쉴 정도로 외치며 제 의사를 밝혔다. 그에게는 편치 않는 짐승의 포효와 별반 다를게 없었겠지만.

 "그에게 보내주지 않으려면, 그냥 죽는게 나아! 이거 놔! 죽을거라고!"
 "오이카와, 못 들은거야? 네 몸은 내가 샀다니까. 당신은 죽더라도 내가 죽여, 알겠어?"

 잠시 소름이 돋았다. 내 몸인데 내 마음대로 못하다니, 너무하지 않은가. 죽는 것도 저 괴물에게 맡겨야 한다니. 잠시 치가 떨리는 제안이엇지만, 고통스럽게 죽기보단 즉시하는게 낫겠다. 총으로 한 방에 죽여주면 좋으련만.

 "애초에 마피아를 앞에 두고 죽겠다고 난리치는 건 말이 안 되잖아. 죽여달라면 편히 보내줄텐데, 왜 그렇게 고통스럽게 일을 만들어?"
 뭐, 부탁해도 안 들어 줄거지만. 섬뜩하게 웃는 녀석의 낯빛이 반질거렸다. 그는 제 손을 다시 잡으며 세게 쥐었다. 잇새로 신음이 튀어나가자, 그는 의아한 듯 제 손목을 들어 살펴보았다.

 "윽."
 "손목? 많이 부었네."

 그는 제 손을 확인 하고선 앞으로 안아들었다. 졸지에 공주님 안기 꼴이 됐지만, 몸이 들리니 저항도 할 수 없었다.

 "걸을 수 없는 것도 아니고, 손목 삔 것 뿐인데. 굳이 이렇게..."
 "걷다가 다리까지 삘지 누가 알아?"

 옥상에서 내려와 사장실로 들어갈 때 까지 나는 그에게 안겨 있어야 했다. 그는 서랍에서 붕대와 약품등을 들고와선 제 손목을 둘러 감쌌다. 얌전히 6층에 있으라던 그의 말을 안 들은게 잘못이었다. 왜 굳이 옥상에 올라가서 이런 몹쓸 꼴을 보이다니, 과거의 내가 정말로 원망스러웠다. 그는 조심스레 제 귀에 대고 속삭였다.

 "오이카와, 사랑한다."

 그러니까 죽으려고 하지마. 그건 결코 당신이 정부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신의 말처럼, 나도 당신을 어쩌면 사랑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명백하게 새겨진,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강압적인 느낌의 언어였다. 억지로 새겨진 사랑을 다시 훑으며, 당신은 다시 사랑을 속삭인다. 그리고 가볍게 입 맞추며 조심스레 사랑을 새긴다. 사랑이란 이질적이고도 모순적인 감정을 마음 속 깊이 담아두고, 어쩌면 거짓일지도 모르는 제 감정을 드러내며.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입을 맞추며, 귓속말로 사랑을 속삭인다.

 

각애(죽을 권리와 살 의무)_Fin.

 

 

 

+(설정)
-마츠카와 잇세이 : 마피아 보스. 현재 회사 운영 중. 회사라 해도 허물만 회사일 뿐, 실제로 없는 유령회사. 무기상이며 마약거래도 함.
-오이카와 토오루: 회사원이었으나 애인이었던 이와이즈미 하지메가 오이카와를 마피아 보스에게 파는 바람에 마츠카와네 저택에서 살게됨. 이와이즈미가 자신을 데리러 올거라 믿고 있음.
-이와이즈미 하지메: 마츠카와에게 빚이 있음. 그래서 오이카와를 대신 팔아넘김.

 

-

본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늦어지더라도 감안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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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을 새기다

각애(刻愛) 스핀오프

 

 

 

마츠×오이

 

 

저번 여름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더웠으나, 그나마 나았던 점은 회사에 틀어박혀 에어컨이나 틀어놓고 남은 잔업을 처리하기만 하면 된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이번 여름은 조금 달랐다. 아무 일도 하지않고 있기에는 너무나도 지루했던 터라, 나가서 산책이라도 하고픈 마음이었다. 대낮부터 아무것도 없는 건물에 붙박혀 있는 것은, 결코 원하던 바가 아니었다. 그나마 에어컨이라도 달려있어서 다행이지, 그것도 아니었으면 여름 더위에 쪄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의 사무실은 단조로운 편이었다. 적어도 전에 있던 회사와는 전혀 달랐다. 가끔씩 지시를 받으러 올라갔던 사장실의 풍경과도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간결하게 책상 하나가 있었고, 그 위에는 요즘에는 쓰지 않을 법한 깃펜 하나가 잉크 통에 세워져 있었다. 또한 접대를 위한 테이블과 소파 외엔 어떠한 가구도 찾아볼 수 없는 간결함이 흐르고 있었음엔 틀림없었다.
그렇지만 그 밖의 비서실엔 서류들이 넘쳐 났는데, 그의 비서는 꽤나 성실한 편이라 오전에는 거의 일을 다 끝내곤 했다. 아니, 하는 일이 그닥 없어서 그런건지도 모르겠다. 아무렴, 유령회사에서 무슨 할 일이 있겠는가. 여튼, 그의 사무실은 정갈하게 정돈 되어 있음이 확실했다. 적어도 어제까지는.

오늘 그의 사무실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따분한 분위기를 풍기며 차갑게 식은 책상과 딱딱한 가구만이 나를 반길 뿐이었다. 책이라도 읽어야 할 것 같아서 품속에 안고 왔기에 망정이지, 책이라도 가지고 오지 않았더라면 또 적막한 시간을 보내야 했을 것이다. 그는 가끔 거래를 할 때 나를 데리고 같이 나오곤 했는데, 그는 내가 도망갈 것을 걱정했는지 사장실에 보안장치를 걸어놓고는 거래가 끝날 때까지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더운 여름, 에어컨이나 틀어놓은 사무실에 박혀 지내는 것도 나쁘진 않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전에는 특별하다 느끼지 못했던 자유가 간절해지자 옥상에서 뛰어내릴 성 싶었던 제 계획도 그의 손에 산산조각나 부서졌다. 죽겠다 다짐했었던 그 허망한 각오마저도 사라진지 오래다.

"물이라도 드시겠어요?"

그의 비서였다. 그와는 초면이었다. 솔직히 말해 달가운 편은 아니었다.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분홍색 머리카락은 오히려 자신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고, 그의 존재마저도 전 애인-그의 비서직에서 해고당했다-이 떠오르는 탓에 쉽게 웃어보일 수만은 없는 법이었다. 하지만 적개심을 드러낼 의도는 없었기에 한껏 치장된 웃음를 내보이며 미소지었다.

"네. 감사합니다."

그는 조용히 비서실로 가서 물을 한 잔 가지고 왔다. 안에는 얼음이 한 가득 담겨있는 채였다. 나는 그에게서 물 잔을 받아들고선 조심히 한 모금 들이켰다. 차가운 물이 목으로 시원스레 넘어갔다. 그는 빤히 제가 물 마시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서도 신경쓰지 않으려 애썼다.

때 마침 거래를 끝낸 마츠카와가 들어왔다. 그는 귓속말로 비서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잠시 귀 기울여 듣다가 인사를 꾸벅 하고는 비서실로 다시 돌아가는 그 비서를 황망히 바라보다가, 제 시선은 그에게로 향했다. 그는 입가를 만지작거리다가 시선을 얼음만 남아있는 물잔으로 고정시켰다. 움직이는 그의 눈동자가 고요하게 빛났다.

"더워. 밖에 나가면 안 돼?"
"안 돼. 지금 폭염이라 나가면 죽어. 그냥 여기 있어. 에어컨도 틀어놨는데, 진짜로 더워?"
"더워."
"그럼 시원하게 해줄게."

그는 제 몸을 소파위에 눕히더니 얼음이 든 컵을 집어들었다. 그대로 몸에 부으려는 건가. 조금 무서워지기도 했으나 아마 그는 그러려는 의도가 아니었으리라. 물은 다 마셨지만 얼음이 맨 살에 닿으면 아마 차갑다기 보단 아프단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나는 손을 들어 그를 제지하려고 했으나 두 손목은 그의 한 손에 잡혀있었고, 그는 물 컵을 들고선 제 위로 그의 몸을 겹쳐왔다. 결국 그가 덮치는 자세로 제 몸을 깔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거 풀어줘. 더우니까 손 좀,"
"더우니까 시원하게 해준댔잖아. 조금만 참아."

그러고선 한 손에 들고 있던 컵에서 얼음 한 조각을 입에 넣고선, 밑에 깔린 제 입에 넣어주었다. 그의 타액이 섞인 투명한 얼음 조각이 제 입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투명한 액체가 그의 입에서 떨어져 제 볼으로 흘러내렸다. 얼음은 그의 입에 삼켜져 제 입으로 옮겨졌다. 부드럽게 녹아드는 얼음이 차가워야 할텐데, 그의 타액에 닿아 뜨겁다. 그의 시선마저도 정열적으로 타들어간다.

"하나, 더 줄까?"

그의 목소리는 낮게 제 귓가를 울린다. 억지스럽게 요구하는 말투는 아니었으나 분명 강압적인 부분이 있었다. 안 먹는다 해도 억지로 먹일 것이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얕게 웃으며 다시 컵의 얼음을 한 개 입에 머금었다. 얼음을 녹이는 그의 혀가, 어쩌면 야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잔뜩 머금은 얼음과 물을 제 입으로 넘겨주었다.

아니. 넘겨주다가 그의 입이 제 것을 삼킬 듯이 물고 놓아주지 않았다. 서로의 혀가 얽히면서 차가운 얼음을 물고 놓아주지 않았다. 말캉한 혀가 서로 부딪히며 얼음 조각을 녹혔다. 점차 작아지는 얼음 조각에 더 격하게 얽혀드는 혀가 뜨거웠다. 축축하게 얽혀드는 그의 혀가 부드럽게 제 혀를 감쌌다. 얼음이 다 녹고 나서도 그의 혀는 멈추지 않고 계속 입 안을 헤집었다. 이제 야하다 못해 노골적이다. 어느새 그에도 익숙해 졌는지 그의 노골적인 시선을 즐기고 있는 자신을 찾을 수 있었다. 부끄럽다기 보단,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그의 시선을 좇고 있다 보면 빤히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뜨겁게 일렁인다. 그 뜨거움을 즐기는 건 적적한 일상의 즐거움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하나, 더?"
"이번엔, 좀 더 진하게."

나는 그에게 옅은 미소를 흘겨보였다. 그는 제 눈꼬리를 손가락으로 살살 눌렀다. 그의 미소가 제 눈으로 흘러들어왔다. 점차 옅어지는 그의 미소가 제 눈에서 일렁였다. 그가 얼음을 물고 제 입을 향해 다가오자 나는 다시 한 번 조심스레 그의 입을 받아냈다. 서로의 혀는 얽혀서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부드러운 입 맞춤에 시원하긴 커녕 좀 더 더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그를 밀쳐낼 생각은 전혀 없다. 오히려, 그에게서 여름의 -잊지못할- 기억을 받은 것만 같다. 여전히 강렬하게 엉키는 혀가 나를 덮쳐온다.
얼음이 그의 손에 들려있던 컵에서 쏟아져 흘러내렸다. 제 몸으로 흘러내린 얼음이 뜨겁게 달아오른 맨 살에 닿아 투명하게 흘러내린다. 얼마 남지 않은 얼음이었기에 그는 제 팔에 떨어진 얼음을 혀로 감싸고, 제 팔을 핥아 올렸다. 아아, 그의 혀가 제 몸을 뜨겁게 감싼다. 그의 혀로, 여름을 새기며.


여름의 무더위는 얼음에 녹혀져 흩어졌다. 눅진한 기억 속, 그 해 여름을 꺼내며, 다시 한 번 여름을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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