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n after you

 

마츠×오이


*각애 외전


 그 날은, 평소와 다르게 꽤나 고요했던 날이었으나 또, 평소와 다르게 다사다난 했던 날이었다. 하늘은 여느날과 같이 청명한 빛을 머금고 있었고, 구름 한 점 없이 내리쬐는 햇빛은 무더위에 적합했다. 하지만 여전히 더위에 찌들어 건물 안에 처박혀 있는 제 신세는 자유롭지 못했다. 그의 가호아래 밖으로 나다니지도 못하고 에어컨 바람이나 쐬는 신세라니. 누가 들으면 부럽겠다고 구미가 도는 제안일지도 모르겠으나, 별로 달갑지만은 않는 말이다. 아마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왔다면, 그가 과연 이렇게까지 편의를 제공해줄 의향조차 있었을지도 의문이다. 아아, 나는 탄식했다. 부디 나를 편히 놓아줬음 좋으려만. 애석하게도 제 바람은 이미 그의 입맞춤에 묻혀버린지 오래였다. 이제는 맨정신으로 그를 마주하는 일도 힘들었다. 죽여달라고 애원해도 그가 들고있는 총으로 제 몸만 죽이고 정신은 살려놓을 놈이다. 나는 체념한 상태로 차 안으로 들어오는 그를 맞이했다.

 "토오루"
 "무슨 일이시죠, 보스."
 "넥타이가 삐뚤어졌어. 잠깐 나와, 다시 매줄게."

 그는 한 손으로 나를 차 안에서 끄집어내더니 능숙한 손길로 넥타이를 매기 시작했다. 그의 손길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끈적해지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으나 금새 그는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뒷좌석에 올라탔다. 그는 항상 반듯한 모습으로 회사에 가곤 했으므로, 흠잡을데가 없었지만 나는 익숙하지 않은 옷차림을 애써 정리하며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굳이 일도 하지 않는 내가 정장을 입을 이유는 없었던 것 같지만,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좀 더 신경쓰는 듯한 분주한 모습이었다. 그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조금 제 모습이 초라해보이기 그지없었지만 그도 그뿐이었다.

 "그리고 보스는 조금 딱딱하지 않아? 네가 조직원도 아니고, 굳이 그런 호칭으로 날 부를 필요는 없잖아."
 "아직은 어색하니까요"
 "어색하긴, 어제까지만 해도 반말 찍찍 써대는 사이 아니었나?"
 "죄송합니다. 그땐 제가 미쳤나 보,"
 "그러지 말고, 기분좋게 갔다 올테니까 내 이름 불러줘. 오늘은 그닥 내가 좋아하지 않는 손님이 올 예정이라."

 좋아하지 않으면 거래를 잡지 않으면 될 것 아닌가.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외면하고선, 입도 꿈적 안하고 회사로 가려고 했다. 그의 긴 손가락이 제 볼을 살짝 찔렀다. 어리벙벙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피식 웃으며 제 손을 붙잡았다. 그의 끈적한 숨이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 들었다. 그는 제 의도를 파악했는지 이름을 불러주지 않으면 이 손을 놓지 않겠다는 듯, 계속해서 제 옆으로 달라붙어왔다. 그 사이 이미 차는 회사 앞에 도착해 있었다. 그는 아쉽다는 듯 제 손을 놓고, 차에서 내렸다. 그는 제 손을 잡았고, 나는 그의 에스코트 아래 차에서 내렸다. 오늘은 왠일인지 어디로 가라는 그의 명령이 없었고, 그는 계속해서 제 손을 붙잡고 있었다. 오늘은 또 무슨 속셈이지. 그의 손은 여전히 끈적하게 제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고 있었다. 약간 소름이 돋는 터라 잘게 손이 떨렸지만, 그는 별로 개의치 않는 듯 했다.
 오늘은 그도 사장실로 향했다. 평소 같았으면 회의실이나 다른 장소로 가서 거래를 주고 받았을텐데, 오늘은 꽤나 중요한 사람과 거래를 하는 것 같았다. 잘 모르겠지만 감이 그랬다. 그런데 이제와서 그의 이야길 꺼내는 이유가 왠지. 사장실에 들어서자 마자 그는 제게 이런 이야길 꺼내왔다.

 "난 가끔 당신이 떠날까봐 무서워. 당신 마음이 아직 그 쪽에 있거든. 그 놈,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해?"
 "…잘 살고 있어?"
 "아쉽지만, 죽었다는군."
 "개만도 못한 새끼!"
 "입도 적당히 놀려. 그 입 잘라버리기 전에."
 "씹…읍."

 제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잇새로 흘러나온 짧은 외침은 그의 눈빛에 사그라들었다. 그는 제 귀에 대고 낮은 톤의 목소리로 속삭였다. 놀라지 말고 들어, 토오루. 오늘 그가 이 곳으로 올거야. 하지만 기대는 하지 않는게 좋아. 그는 살아있지만, 너를 알고 있는 이와이즈미 하지메는 죽었거든. 그는 이미 너를 기억에서 지웠을테니까.

 조금 멍한 상태로 그를 바라보자 그는 별 말없이 사장실을 떠났다. 같이 올라온 건, 이 말을 하기 위해서였나. 그럼 분명 그가 좋아하지 않는 손님이란 건, 이와쨩을 의미할테다. 하지만 제가 회의실로 간다고 해서 그를 찾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고, 아마 도착하기도 전에 그의 손길에 붙잡혀 다시 그의 집에 처박힐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조용히 기다렸다 그에게 경과를 물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수확일게다. 이와쨩이 살아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할텐데.
 다리에 힘이 풀려주저 앉았다. 정신없이 멍하니 10분 정도를 그렇게 있었을까. 사장실의 문이 열리는게 들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비서실로 들어오는 문이 아니라, 간이로 만들어 놓은 작은 문으로 들어 온 남자는 이와이즈미 하지메였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에게로 달려갔고, 그 또한 제 얼굴을 보고선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이와이즈미는 급하게 제 팔목을 잡아채고선 창문을 깨고 뛰어내렸다. 얘가 약을 먹더니 미쳤나, 하고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다행히도 앞 건물과 높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아서 간신히 옥상에 착지할 수 있었다. 그의 회사를 바라보니, 사장실에서 제 모습을 응시하는 마츠카와의 흔적이 여실하게 깨진 창문사이로 드러났지만, 또한 그 눈빛이 살벌하기 그지 없었으나 나는 도망치기 바빴다. 이제 그의 손에 붙잡혀 사는 건, 치가 떨리는 제안이었다.

 "오이카와, 그 동안 잘 있었어?"
 "응. 이와쨩도 별 일 없었지?"
 "저 새끼가 준 마약 참는 것 빼곤 별로."

 그래도 가끔 발작은 해서 한 알씩 먹어줘야 해. 저 새끼가 뒤쫓아 오진 않겠지? 다른 마약밀수업자를 알아봐야 하나.
 이와이즈미는 정리되지 않은 언어를 내뱉었고, 달리던 도중 그는 무언가가 목에 걸렸는지 한손으로 목을 감싸며 , 한 손으로 주먹을 쥐고 가슴을 연신 쳤다. 답답한 가슴을 부여잡으며 도시 한복판을 달리고 있을 즈음이었다. 어디선가 미약하게 피냄새가 났다. 옆에서 나는 냄새였다. 조심스레 고개를 돌리자 이와이즈미는 켁켁대며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이는 핏물에 물들었고, 나는 조심스레 그에게 다가가서 등을 두들겨 주었다.
 일어날 수 있겠어? 나는 그를 붙잡아 일단 골목으로 끌고 갔다. 이대로 있다가 경찰에게 들켜 병원에 간다해도 그의 신분 -신용불량자에 마약중독- 이 들킬 수 있었으므로 어떻게 보면 그 사람까지 연결될 수 있었기에, 복잡한 일은 피하고 싶었다. 나는 조심스레 옆의 골목으로 그를 데리고 갔다.

 그 순간, 그에게로 총탄하나가 날아들었다. 토해내던 입 속에서 울컥하고 핏물이 솟구쳤다. 가슴을 뚫고 지나간 총탄은 제 앞에 떨어졌고, 눈 밑이 벌겋게 충혈된 이와이즈미의 사체는 제 앞으로 고꾸라졌다. 오이카와는 쓰러진 이와이즈미를 한번 즈윽 훑고선, 다시 고개를 들어 제 앞에 서있는 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분명, 제가 알고있는 이였다. 마츠카와 잇세이. 벗어나고 싶었던 족쇄와도 같은 사람.

 "도대체 왜 죽인거야? 살려 놨으면 좋았을텐데! 살아있었는데!"
 "마약 중독이랬지? 그 새끼, 널 데려 가서 장기매매 업자에게 넘겨줄 심산이었던 것 같은데. 아님 네 장기를 자기 몸에 이식하려는 생각도 했었겠지. 약 때문에 많이 망가졌거든."
 "그럼…."
 "너 죽일 생각은 없으니까, 그냥 나한테로 와. 도망치지 말고."

 갑자기 제 자신이 한심해졌다.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 그를 밀어내려고 했던가. 아아, 마츠카와! 나는 조심스레 그의 손을 붙잡았다. 죄송해요, 다시는 도망 안 칠게요. 믿을 사람 없다는 걸 다시 한 번 절실히 깨닫고 나서는 더 이상 도망칠 여력도 없다. 나는 그의 사죄의 의미로 그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으나, 그가 제게 제안한 것은 터무니 없는 것이었다.

 "이름, 불러줘."

 아직도 이름에 집착하고 있는 걸까. 나는 별 수 없다는 듯, 살며시 미소를 흘기며 그에게 답했다.

 "잇세이."
 "좋아. 토오루. 이제 밤에도 그 상태로 울어줘."

 뭔가 이상한 방향으로 대화가 흘러가고 있음에 틀림없었지만, 나는 무턱대고 끄덕였다. 분명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데 남아있던 여유가 다 사라진 탓이리라. 나는 그에게 안겨있는 채로 그에게 말했다. 좋아합니다. 이제는 진짜 도망치지 않을테니까, 나 미워하지 말아주세요.
 과연 그런 말로 그의 마음이 풀릴 지는 의문이었지만, 그를 이름으로 부르는 건 조금 보류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마피아 보스 이름을 막 부르는 건, 뒤가 조금 찝찝했다. 그래서 그냥 달링을 호칭으로 정하고 마무리했다. 그는 제가 달링하고 부를 때마다 조금 부끄러워 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오히려 즐기는 마음으로 부르고 있다.

 당신이 온전히 제 마음 속으로 들어올 그 날까지 난 당신에게 고마워하고 사랑할테다. 당신이 내 뒤를 뒤쫓듯, 나도 당신의 마음을 뒤쫓으며. 이제는 어느 누구의 마음에도 현혹되지 않고, 오로지 당신만을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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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ly Holiday

 

마츠×오이 

* 각애 스핀오프



 "아아-, 더워."

 더위에 물든 건물은 창문으로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으며, 방 안에 있는 에어컨 조차도 주인이 없는 동안에는 작동이 되지 않았다. 차라리 비서실에 가서 얼음물이라도 달라고 해볼까. 그러기엔 저번 일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 것만 같아서 차마 사장실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작은 선풍기가 책상 위에 놓여져 있었기에 그거라도 틀고선 작은 위안을 삼고 있었다.
 그는 오늘도 타이밍 좋게 거래를 마치고 돌아왔다. 꽤 좋은 결과를 가지고 돌아온 모양이었다. 그는 소규모 회사의 사장인데 (사실 하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가끔씩 오는 손님들과 거래만 하고, 주로 마약류나 총기등을 거래하는 '마피아'라는 사실은 극히 소수만 알고있는 사실이다. 아마 분홍색 머리인 그 비서도 아마 이러한 사실은 모를 것이다.

 그는 책상앞에 있는 선풍기에 얼굴을 대고 투덜대는 제 얼굴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며 말을 건넸다. 그리고 서랍에서 에어컨 리모컨을 꺼내더니 무심하게 전원을 키고선 다시 집어넣었다. 그냥 틀어놓고 갈 것이지. 몇 시간 동안 더위에 방치시켜 놓은 그가 조금 미워질 뻔 했지만, 그 다음 그의 말에 누그러졌다.

 "영화보러 갈래?"
 "영화관?"
 "응."

 월척이다. 최근에 꼭 보고 싶었던 영화가 있었는데 집에서는 영화를 본다해도 그가 계속 달라붙어와서 힘들터였고, 최근에 바깥에 나가지 못해 많이 수척해 진 것 같았는데 그런 기분도 모조리 다 날려버릴 만한 제안이었다. 그 달콤한 제안을 어찌 거절할 수 있을까. 나는 그가 말을 바꿀세라 나는  재빨리 가겠다고 했다. 어딘가 찝찝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설마, 영화관을 통채로 빌린다거나...?"
 "그런짓은 안 해. 가서 영화 보려는거 아냐?"
 "아님 나 혼자 갔다 올...까?"
 "같이 가. 안 달라붙을게."

 그렇다면 답은 간단하다. 좋아, 가자. 더운데 잘됐다. 하지만 아직까지 괴리감을 떨쳐버리진 못했다. 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채로 다시 그의 손에 붙잡혀 영화관을 가야 했다. 그래도 나갈 수 있다는 자유에 사로잡혀 별 말 없이 그를 따랐다.

 "자리는, 각자 떨어져서 앉,"
 "이미 예매했어."
 "팝콘은?"
 "가서 사줄게."

 휴일이랍시고 거래도 빨리 끝내고 오셨댄다. 그럼 그가 원하는 대로 해줘야겠지. 나는 잔말않고 그를 따라 가기로 했다. 한 손엔 팝콘을 들고, 한 손엔 콜라를 들고 그를 따라간 2관에서는, 아직까지 광고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평일 오전이라 그런지 사람도 별로 많이 없는 것 같았다. 설마 이런 곳에서 이상한 짓 하려는 건 아니겠지, 하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긴장감을 놓을 순 없었다.

 "이거, 보고 싶은 거 맞아?"
 "으, 응."
 "꽤, 마니악하네. 이런 거, 좋아해?"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2관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를 찾아가니, 것도 영화관 구석이다. 진짜 어떤 흑심도 없는 것일까. 나는 여전히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그리고 영화보는 내내, 내용에는 집중하지 못하고 무심하게 쓰다듬는 그의 손길을 느끼지 않으려 애써야 했다. 다음부터 내가 그 녀석이랑 영화관에 오나 봐라, 진짜. 그리고 끌려 올테다, 제기랄.

 "그러니까, 이런 외설적인 영화는 집에서 나랑 보는게 좋겠지?"
 "당신이 손으로 만지지만 않았어도..!"
 "느꼈잖아. 응? 기분은 좋았지?"

 그는 능글맞게 웃으며 제 대답을 기다렸으나 나는 부끄러워 고개를 푹 숙인채로 그저 끄덕이기만 할 뿐이었다. 그는 뭔가 생각이 난 듯 제 어깨를 그의 큰 손으로 감싸더니, 말을 이었다.

 "역시 공공장소는 아닌 것 같아. 당신이 느끼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진 않거든. 정 영화가 보고 싶으면 말해. 안 쓰는 건물 하나 매입해서 영화관으로 만들어 놓을게."
 "그냥 집에서 볼게. 미안. 굳이 나오겠다고 고집피워서."

 말이 안 통하는 놈이다. 그냥 제 몸 간수만 잘한다면 별 상관 없을 것 같으니 순순히 그의 요구에 따르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가볍게 그의 입에 키스하고선,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는 옅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휴일이라기엔 조금 어지러운 날이었다. 영화관은 특히 생각치도 못한 일을 당했으나, 나를 위로한답시고 바닷가로 드라이브한건 꽤 기분좋은 느낌이었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닷 바람이 기분좋게 찰랑였다. 그의 차에서 내려 그의 손을 잡고 가볍게 볼에 입맞추며, 그의 집으로 들어간다. 이제는 익숙해진 당신에게 속삭이며.

 "사랑합니다. 이제는 도망 안 가니까, 걱정 안 해도 돼요. 나, 당신을 꽤나 사랑하고 있으니까."
 "그래? 그거 고마운데."

비록 처음은 강제였으나, 지금은 조금 다른 사랑을 속삭이며.


    

 

각애(刻愛)
(부제: 죽을 권리와 살 의무)


 


*나래님 생일 축전))
*마츠×오이(+이와)

 

 

 

 열린 창문 새로 바람이 옅게 불어오고 있었다. 거무죽죽한 안개가 부옇게 흐려오던 오전이었다. 축축한 습기를 머금은 공기는 눅진하게 스며들었다. 허리 부근이 아프다 못해 아리다. 한 손으로 허리를 부여 잡으며 침대에서 일어나니, 그 전날의 기억이 머릿 속을 어지러이 유영했다. 아슬아슬한 기억속에 그와의 접문이 아릿한 기억으로 자리잡았다. 결코, 말하건대 그의 키스는 최악이었다.
오늘에야 말로 죽어버릴테다. 각오는 산산히 부서져 그의 입술에 먹혔다. 어젯밤 죽을 각오를 하고 건물 밖으로 빠져 나가려고 했지만, 보안 장치에 다시 제 방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는 모든 걸 다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새벽이 주변을 가릴 즈음, 제 방으로 찾아와 자고 있는 제 몸을 덮치며 조심스레 키스했다. 입 맞춤은 최악이었다. 혀를 휘감아 오는 그의 입이 제 것을 물어 뜯을 듯이 달려들었다. 솔직히 말해, 못한다기 보단 너무 아팠다. 그가 깨문 제 입이 붉게 부어올랐다.

 "오이카와. 나갈 생각은 하지 않는게 좋을거야."

 그리고 그는 방을 나갔다. 잠시의 접문을 끝내고, 밤이 그리 빨리 흘러가는지도 느끼지 못한채로 잠들었다. 깨어나 보니 해가 이미 중천에 떠있었다. 또한, 제 옷은 갈아입혀져 있는 상태로, 그의 차에 태워져 회사로 가는 중이었다. 아마도 그가 골랐을 수트는 깔끔하게 입혀져 있었고, 그는 유유히 운전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다 왔어. 내려."
 "여긴 뭐하러 왔어? 할 일도 없잖아. 유령회사에서 할 일이 뭐가 있다고."
 "오늘 거래가 있을거야. 중요한 거래니까, 6층에서 조용히 있어."
 "잠깐 시내에 나가는 건 안 돼? 이와쨩만 잠깐 보고 다시 돌아올..."
 "안 돼."
 "내가 억지로 빠져나간다면?"
 "그땐 사지를 절단해 버릴거야."

 그러니까 말로 할 때 들어. 나도 네 사지를 절단하고 싶진 않거든. 아직 제대로 맛도 보지 못했는데 죽어서야 되겠어?
그의 말소리가 이질적으로 흩어졌다. 나는 그를 뒤로 하고 사장실로 향했다. 아마 거래는 회의실에서 이루어질게다. 그는 순순히 뒤를 돌아 회의실로 향했고, 사장실로 가려다가 담배나 한 개비 피우려고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아무 것도 없는 휑한 공간이 자신을 반긴다. 하늘은 오늘따라 흐릿했다.

 이와쨩이 다시 돌아왔으면 좋을텐데. 담배를 피우면서도 그가 떠올랐다. 아마 비흡연자였던 이와이즈미의 호통이 생각났던 탓인지도 모르겠다. 담배는 냄새도 맡기 싫다며 거부하더니, 결국 이런 상태다. 물론 담배 때문에 떠나간 건 아닐지라도, 매한가지다. 그는 내가 싫었던걸까. 담배 끊기는 좀 힘든데. 그가 깔리는게 아파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이와쨩은 나를 마츠카와에게 팔아 넘기고 이 빌어먹을 공간을 나갔다. 그의 감시 아래 있었던 그가, 자유를 되찾고 밖으로 나갔다. 지금이라도 이와쨩이 돌아와서 날 데리고 나가겠다고 와준다면, 난 다시 받아줄 의향이 있다. 이와쨩이 싫다고 해도 나는 그를 붙잡고 나갈게다. 그럴러면 제 몸 값을 지불할 -원래는 이와이즈미의 빚이었다- 돈이 있어야겠지. 애인을 팔아먹고 빚을 갚은 남자에게 줄 수 있는 건, 벌 뿐이다. 마츠카와에게서 벗어난다면, 반드시 그를 만나 그 간의 서러움을 알려주리라.

 무튼 나는 그를 만나고 싶었다. 지금 이 건물에서 뛰어내려 중상을 입는다 해도 -즉사만 아니라면- 그를 볼 수 있다면 나는 뛰어내릴 것이다. 가장 바라는 건, 지금 이와쨩이 내가 있는 곳을 알아내서, 마츠카와가 거래하는 동안에 나를 빼내는 거였다. 하지만 제 기대는 역시나 부서졌다. 정말로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속박되어 사는 것보단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게 낫겠다고, 저 괴물같은 남자에게 잡아먹힐 바엔 세상을 등지는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이젠 생각의 자유도 없는 건가. 그는 거래가 끝났는지 상쾌한 얼굴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저게 이와쨩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허황된 미래를 잠시 상상해 보았다. 하지만 현실은 너무나 일찍 찾아왔다.

 지쳐 쓰러지던 제 손을 잡아 올린 건, 그가 아니었다. 깊은 눈매로 나를 응시하던 남자는, 넘어져 있던 제 몸을 일으켜 세우고선, 뒤에서 나를 꽉 끌어 안았다. 그의 품에 폭하니 파묻힌 제 몸부림은 그의 팔에 간단히 제압되었다. 그는 그 단단한 손으로 제 몸을 끌어 올리고선, 파도처럼 잔잔한, 낮은 톤의 목소리로 제 귀를 현혹시켰다.

 "놔! 난 죽을거라고! 이거 놔!"
 "토오루."

 그의 어두운 목소리가 제 귓가를 스치고, 그의 손은 제 몸을 더 억죄어 온다. 더듬는 그의 손길이 어딘가 모르게 음습하다. 옅게 웃는 그의 웃음소리가 제 귀에 박혔다. 호탕하게 웃는 것도 아니고, 한숨과 가까운 웃음을 흘겼다.

 "이거..., 놔줘."

 태도를 바꾸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에게는 이렇게 접근하는게 빠져 나오기 쉬울 것 같았다. 되도록이면 편히 죽길 원했다. 나는 결정되지 않은 미래에 선뜻 표를 던질만한 용기는 없었다. 그의 말소리가 이질적으로 제 가슴을 찔러온다. 곧 비수가 되어 제 마음을 갈갈이 찢어놓았다.

 "넌 못 죽어. 알잖아? 네 몸은 내가 샀으니까, 네가 독단적으로 움질일 수 있는게 아니란 말이다."
 "보스..."

 나는 최대한 애절하게, 비굴하게 나 자신을 낮추고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의아하다는 듯 나를 내려다 보는 그 눈빛에 서늘함을 담고 있었다.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의 눈에 제가 온전히 파묻히게 된 것이었다. 그를 가까이서 보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이었거니와 그는 처음으로 -느낌이지만- 내 눈을 정확히 쳐다보고는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고개를 돌리니 그의 얼굴이 보였다. 금욕적인 얼굴을 가진 이 남자는, 뇌쇄적인 미소를 흘기며 제 본능을 자극했다. 그것은, 수컷 짐승의 구애 같기도 했고, 혹은 질투에 눈이 먼 남자의 발악같기도 했다. 제 몸을 감싸오는 그의 손길이 야릇한 본능을 지니고 있었다면, 그의 표정만으로는 이미 모든 걸 끝낸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의 압도적인 미소에 나는 조심히 꼬리를 내리고 위협을 느끼면서도 조금은 대담한 손길로 그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는 가소롭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고선, 다시 한 번 제 볼에 입을 맞추었다.

 "틀렸어. 난 네 보스가 아니라 애인이지."
 "미친, 당신이 왜 내 애인이야."
 "몸 맞고 마음 맞으면 애인이지. 아직도 그 녀석한테 미련을 가지고 있는거야? 널 버리고 떠난 놈인데도?"

 갑자기 울화가 치밀었다. 그는 그런 뜻으로 나간게 아닌데. 분명 그는 다시 돌아올거라 믿고 있었다. 그런 믿음을 그는 단 3초의 정적으로 깨뜨려 주었다.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의 침묵은 어느새 바람결에 흩날려온 마냥 다시 스치듯 흘러갔다. 그가 팔을 느슨하게 풀려는게 느껴졌다. 나는 그 틈을 타 어떻게든 안간힘을 썼고, 몸은 빠져나왔을지언정 마지막에 붙잡힌 손목은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부어오른 손목이 아릿했다. 더 세게 쥐어오는 탓에 통증은 더 심해졌다. 점점더 그의 손이 제 것을 쥐고 억죄어 왔다.
나는 있는 힘껏 발악을 했다. 그의 표정이 약간 험악해 졌음을 느꼈지만 개의치 않았다. 나는 당신의 그 잘난 손에 붙잡혀 총으로 맞고 칼로 난도질 당해 처참히 생을 마감하고픈 마음은 없다. 적어도 생의 마지막을 그런식으로 끝낼수는 없다고 하는게 맞겠다.

 그와의 언쟁이 점차 심해지다 못해 극에 다다랐다. 제 목소리는 여전히 공기를 갈랐지만, 그는 평소와 같이 고요한 울림이었다. 나는 목이 쉴 정도로 외치며 제 의사를 밝혔다. 그에게는 편치 않는 짐승의 포효와 별반 다를게 없었겠지만.

 "그에게 보내주지 않으려면, 그냥 죽는게 나아! 이거 놔! 죽을거라고!"
 "오이카와, 못 들은거야? 네 몸은 내가 샀다니까. 당신은 죽더라도 내가 죽여, 알겠어?"

 잠시 소름이 돋았다. 내 몸인데 내 마음대로 못하다니, 너무하지 않은가. 죽는 것도 저 괴물에게 맡겨야 한다니. 잠시 치가 떨리는 제안이엇지만, 고통스럽게 죽기보단 즉시하는게 낫겠다. 총으로 한 방에 죽여주면 좋으련만.

 "애초에 마피아를 앞에 두고 죽겠다고 난리치는 건 말이 안 되잖아. 죽여달라면 편히 보내줄텐데, 왜 그렇게 고통스럽게 일을 만들어?"
 뭐, 부탁해도 안 들어 줄거지만. 섬뜩하게 웃는 녀석의 낯빛이 반질거렸다. 그는 제 손을 다시 잡으며 세게 쥐었다. 잇새로 신음이 튀어나가자, 그는 의아한 듯 제 손목을 들어 살펴보았다.

 "윽."
 "손목? 많이 부었네."

 그는 제 손을 확인 하고선 앞으로 안아들었다. 졸지에 공주님 안기 꼴이 됐지만, 몸이 들리니 저항도 할 수 없었다.

 "걸을 수 없는 것도 아니고, 손목 삔 것 뿐인데. 굳이 이렇게..."
 "걷다가 다리까지 삘지 누가 알아?"

 옥상에서 내려와 사장실로 들어갈 때 까지 나는 그에게 안겨 있어야 했다. 그는 서랍에서 붕대와 약품등을 들고와선 제 손목을 둘러 감쌌다. 얌전히 6층에 있으라던 그의 말을 안 들은게 잘못이었다. 왜 굳이 옥상에 올라가서 이런 몹쓸 꼴을 보이다니, 과거의 내가 정말로 원망스러웠다. 그는 조심스레 제 귀에 대고 속삭였다.

 "오이카와, 사랑한다."

 그러니까 죽으려고 하지마. 그건 결코 당신이 정부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신의 말처럼, 나도 당신을 어쩌면 사랑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명백하게 새겨진,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강압적인 느낌의 언어였다. 억지로 새겨진 사랑을 다시 훑으며, 당신은 다시 사랑을 속삭인다. 그리고 가볍게 입 맞추며 조심스레 사랑을 새긴다. 사랑이란 이질적이고도 모순적인 감정을 마음 속 깊이 담아두고, 어쩌면 거짓일지도 모르는 제 감정을 드러내며.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입을 맞추며, 귓속말로 사랑을 속삭인다.

 

각애(죽을 권리와 살 의무)_Fin.

 

 

 

+(설정)
-마츠카와 잇세이 : 마피아 보스. 현재 회사 운영 중. 회사라 해도 허물만 회사일 뿐, 실제로 없는 유령회사. 무기상이며 마약거래도 함.
-오이카와 토오루: 회사원이었으나 애인이었던 이와이즈미 하지메가 오이카와를 마피아 보스에게 파는 바람에 마츠카와네 저택에서 살게됨. 이와이즈미가 자신을 데리러 올거라 믿고 있음.
-이와이즈미 하지메: 마츠카와에게 빚이 있음. 그래서 오이카와를 대신 팔아넘김.

 

-

본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늦어지더라도 감안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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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을 새기다

각애(刻愛) 스핀오프

 

 

 

마츠×오이

 

 

저번 여름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더웠으나, 그나마 나았던 점은 회사에 틀어박혀 에어컨이나 틀어놓고 남은 잔업을 처리하기만 하면 된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이번 여름은 조금 달랐다. 아무 일도 하지않고 있기에는 너무나도 지루했던 터라, 나가서 산책이라도 하고픈 마음이었다. 대낮부터 아무것도 없는 건물에 붙박혀 있는 것은, 결코 원하던 바가 아니었다. 그나마 에어컨이라도 달려있어서 다행이지, 그것도 아니었으면 여름 더위에 쪄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의 사무실은 단조로운 편이었다. 적어도 전에 있던 회사와는 전혀 달랐다. 가끔씩 지시를 받으러 올라갔던 사장실의 풍경과도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간결하게 책상 하나가 있었고, 그 위에는 요즘에는 쓰지 않을 법한 깃펜 하나가 잉크 통에 세워져 있었다. 또한 접대를 위한 테이블과 소파 외엔 어떠한 가구도 찾아볼 수 없는 간결함이 흐르고 있었음엔 틀림없었다.
그렇지만 그 밖의 비서실엔 서류들이 넘쳐 났는데, 그의 비서는 꽤나 성실한 편이라 오전에는 거의 일을 다 끝내곤 했다. 아니, 하는 일이 그닥 없어서 그런건지도 모르겠다. 아무렴, 유령회사에서 무슨 할 일이 있겠는가. 여튼, 그의 사무실은 정갈하게 정돈 되어 있음이 확실했다. 적어도 어제까지는.

오늘 그의 사무실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따분한 분위기를 풍기며 차갑게 식은 책상과 딱딱한 가구만이 나를 반길 뿐이었다. 책이라도 읽어야 할 것 같아서 품속에 안고 왔기에 망정이지, 책이라도 가지고 오지 않았더라면 또 적막한 시간을 보내야 했을 것이다. 그는 가끔 거래를 할 때 나를 데리고 같이 나오곤 했는데, 그는 내가 도망갈 것을 걱정했는지 사장실에 보안장치를 걸어놓고는 거래가 끝날 때까지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더운 여름, 에어컨이나 틀어놓은 사무실에 박혀 지내는 것도 나쁘진 않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전에는 특별하다 느끼지 못했던 자유가 간절해지자 옥상에서 뛰어내릴 성 싶었던 제 계획도 그의 손에 산산조각나 부서졌다. 죽겠다 다짐했었던 그 허망한 각오마저도 사라진지 오래다.

"물이라도 드시겠어요?"

그의 비서였다. 그와는 초면이었다. 솔직히 말해 달가운 편은 아니었다.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분홍색 머리카락은 오히려 자신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고, 그의 존재마저도 전 애인-그의 비서직에서 해고당했다-이 떠오르는 탓에 쉽게 웃어보일 수만은 없는 법이었다. 하지만 적개심을 드러낼 의도는 없었기에 한껏 치장된 웃음를 내보이며 미소지었다.

"네. 감사합니다."

그는 조용히 비서실로 가서 물을 한 잔 가지고 왔다. 안에는 얼음이 한 가득 담겨있는 채였다. 나는 그에게서 물 잔을 받아들고선 조심히 한 모금 들이켰다. 차가운 물이 목으로 시원스레 넘어갔다. 그는 빤히 제가 물 마시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서도 신경쓰지 않으려 애썼다.

때 마침 거래를 끝낸 마츠카와가 들어왔다. 그는 귓속말로 비서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잠시 귀 기울여 듣다가 인사를 꾸벅 하고는 비서실로 다시 돌아가는 그 비서를 황망히 바라보다가, 제 시선은 그에게로 향했다. 그는 입가를 만지작거리다가 시선을 얼음만 남아있는 물잔으로 고정시켰다. 움직이는 그의 눈동자가 고요하게 빛났다.

"더워. 밖에 나가면 안 돼?"
"안 돼. 지금 폭염이라 나가면 죽어. 그냥 여기 있어. 에어컨도 틀어놨는데, 진짜로 더워?"
"더워."
"그럼 시원하게 해줄게."

그는 제 몸을 소파위에 눕히더니 얼음이 든 컵을 집어들었다. 그대로 몸에 부으려는 건가. 조금 무서워지기도 했으나 아마 그는 그러려는 의도가 아니었으리라. 물은 다 마셨지만 얼음이 맨 살에 닿으면 아마 차갑다기 보단 아프단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나는 손을 들어 그를 제지하려고 했으나 두 손목은 그의 한 손에 잡혀있었고, 그는 물 컵을 들고선 제 위로 그의 몸을 겹쳐왔다. 결국 그가 덮치는 자세로 제 몸을 깔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거 풀어줘. 더우니까 손 좀,"
"더우니까 시원하게 해준댔잖아. 조금만 참아."

그러고선 한 손에 들고 있던 컵에서 얼음 한 조각을 입에 넣고선, 밑에 깔린 제 입에 넣어주었다. 그의 타액이 섞인 투명한 얼음 조각이 제 입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투명한 액체가 그의 입에서 떨어져 제 볼으로 흘러내렸다. 얼음은 그의 입에 삼켜져 제 입으로 옮겨졌다. 부드럽게 녹아드는 얼음이 차가워야 할텐데, 그의 타액에 닿아 뜨겁다. 그의 시선마저도 정열적으로 타들어간다.

"하나, 더 줄까?"

그의 목소리는 낮게 제 귓가를 울린다. 억지스럽게 요구하는 말투는 아니었으나 분명 강압적인 부분이 있었다. 안 먹는다 해도 억지로 먹일 것이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얕게 웃으며 다시 컵의 얼음을 한 개 입에 머금었다. 얼음을 녹이는 그의 혀가, 어쩌면 야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잔뜩 머금은 얼음과 물을 제 입으로 넘겨주었다.

아니. 넘겨주다가 그의 입이 제 것을 삼킬 듯이 물고 놓아주지 않았다. 서로의 혀가 얽히면서 차가운 얼음을 물고 놓아주지 않았다. 말캉한 혀가 서로 부딪히며 얼음 조각을 녹혔다. 점차 작아지는 얼음 조각에 더 격하게 얽혀드는 혀가 뜨거웠다. 축축하게 얽혀드는 그의 혀가 부드럽게 제 혀를 감쌌다. 얼음이 다 녹고 나서도 그의 혀는 멈추지 않고 계속 입 안을 헤집었다. 이제 야하다 못해 노골적이다. 어느새 그에도 익숙해 졌는지 그의 노골적인 시선을 즐기고 있는 자신을 찾을 수 있었다. 부끄럽다기 보단,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그의 시선을 좇고 있다 보면 빤히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뜨겁게 일렁인다. 그 뜨거움을 즐기는 건 적적한 일상의 즐거움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하나, 더?"
"이번엔, 좀 더 진하게."

나는 그에게 옅은 미소를 흘겨보였다. 그는 제 눈꼬리를 손가락으로 살살 눌렀다. 그의 미소가 제 눈으로 흘러들어왔다. 점차 옅어지는 그의 미소가 제 눈에서 일렁였다. 그가 얼음을 물고 제 입을 향해 다가오자 나는 다시 한 번 조심스레 그의 입을 받아냈다. 서로의 혀는 얽혀서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부드러운 입 맞춤에 시원하긴 커녕 좀 더 더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그를 밀쳐낼 생각은 전혀 없다. 오히려, 그에게서 여름의 -잊지못할- 기억을 받은 것만 같다. 여전히 강렬하게 엉키는 혀가 나를 덮쳐온다.
얼음이 그의 손에 들려있던 컵에서 쏟아져 흘러내렸다. 제 몸으로 흘러내린 얼음이 뜨겁게 달아오른 맨 살에 닿아 투명하게 흘러내린다. 얼마 남지 않은 얼음이었기에 그는 제 팔에 떨어진 얼음을 혀로 감싸고, 제 팔을 핥아 올렸다. 아아, 그의 혀가 제 몸을 뜨겁게 감싼다. 그의 혀로, 여름을 새기며.


여름의 무더위는 얼음에 녹혀져 흩어졌다. 눅진한 기억 속, 그 해 여름을 꺼내며, 다시 한 번 여름을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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