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은 고사하고, 오로지 증오로만 가득찼다. 단 한 가닥의 관심조차도 제게 남아있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늘, 그것도 항상 제 곁에 있었기에 어떻게든 떨어지려 해도 그럴 이유가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제 인생의 이정표와 마찬가지였다. 굳이 나서서 그를 밀치고 제지할 필요가 없었단 것이다. 쿠로에 대한 전반적인 느낌을 말해보자면, 엄마랄까. 딱히 그렇게 대단한 관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쿠로는 항상 나를 특별하게 생각했다.
 -난 쿠로를 좋아해. 근데 그거 알아? 난 쿠로가 싫어.
 이토록 변덕스러울까. 나는 머릿 속으로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되려 헤집으며 어지럽혔다. 산산조각나 떠다니던 기억의 잔해들이 서로 부딪혔다. 쿠로오의 얼굴이 떠올라 무의식적으로 휘젓다보니 어느새 쿠로의 손이 제 얼굴을 감쌌다. 쿠로오는 지긋이 바라보며, 그 특유의 능글맞은 말투로 뭔가를 지껄이더니 제 이마에 가볍게 입맞췄다. 그리 달갑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역겨운 것도 아니었다. 자연스러운 행위였기에 서로에게 딱히 흥분될만한 쾌락을 줄 요소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쿠로는 매일 장난식으로 제게 사랑을 고백하며 안아주는게 고작이지만, 그것마저도 기뻐하는 눈치였다. 실상은 게임을 하고 있는 나를 무릎에 앉혀놓고 얼굴만 감상할 뿐이지만.

 고등학교 시절은 그렇게 흘렀다. 매일 부활동, 혹은 수업. 그리고 게임. 딱히 새로울만한 일도 없었다. 쿠로가 성인이 되었을 때에 이제 부활동에서 벗어날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던 것이 리에프 때문에 깨어지긴 했지만. 다른 특별한 일은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따금씩 쿠로오가 학교로 찾아온 것 빼곤, 관심도 없었던 1년이 어느덧 흘러 성인이 되어 있었다.
 대학에 넣었는데 하필 같은 대학. 쿠로오가 같이 방을 쓰지 않겠냐고 물어왔기에 괜찮다고 답했으나, 기숙사에 자리가 없어서 결국 승낙했다. 룸메이트로 지내는 것도 몇 달 뿐이다. 언제까지고 그에게 의지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니던가. 쿠로오가 지긋이 쳐다보는 눈길에 움찔했으나 여전히 손은 바삐 움직였다. 예전처럼 나를 안아서 무릎에 앉혀놓고 게임을 하는 일도 드물었거니와, 그런 제안을 하더라도 거절 할 생각이었다.

 "켄마. 게임 좀 그만해."
 " ……."

 별 수 없이 게임기를 내려놓자 쿠로오가 제게 다가왔다. 옷매무새를 정리해 주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노트북 앞으로 다가가는 쿠로를 황망히 바라보며 다시 주저 앉아 게임기를 집어들었다. 그 순간 손에서 게임기가 사라졌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는데 언제 제 뒤에 왔는지 그가 게임기를 가져간 것이었다.

 "줘."
 "켄마…, 너."
 "응."
 "…하아. 아니다. 먼저 들어가서 잘게."

 그는 그 말을 뒤로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나도 시계를 한 번 보고선 방으로 들어갔다.

 쿠로오는 너무 감싸려고 하는 편이었다. 오히려 그 절제가 안 좋은 방면으로 나타난게 틀림없지만, 그게 진심인지 아닌지를 모르겠단 것이다. 오히려 자신은 더 분명하게 표현해 줬으면 좋겠는데 그러지도 않고. 또, 아기보는 마냥 막 하지말라고만 하거나 챙겨주는 일은 삼갔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전에도 신입생 환영회에서 술에 취해 잠이 들었었는데, 그때 과선배가 나를 들쳐업고선 집으로 갔을 때 쿠로오가 많이 화냈었다. 최근에도 담배를 피다가 걸려서 혼나기도 했고. 대체 왜 혼나야 하는지를 잘 모르겠단 것 빼곤, 그와 충돌하는 일은 그다지 없었다.

 "쿠로. 좋아해."
 "켄마? 무슨 소리야?"
 "쿠로가 나 좋아하는 거 알고있어."
 "……"
 "왜, 왜 아무말도 안 해? 진짜야?"

 쿠로가 날 좋아하면, 날 좀 더 만지고 싶어하고, 또 막 그런 짓도 하고 싶어하는 게 남자아냐? 나만 남자야? 쿠로, 혹시 거기에 문제있는 건.

 "조만한게. 뭐라 지껄이는거야? 내가 너를 좋아하는 것도 맞지만, 그런 짓을 하려고 너를 사랑하지는 않아. 내가 너에게 해주고 싶은 건, 마음 깊이 사랑하고 그저 묵묵히 안아주면서 네가 마음의 안정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거야."
 "……."
 "그리고 그건, 서로가 마음 깊이 사랑하고 있을 때, 그 때."

 그 때 하자.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렁였다. 아아, 이래서 난 쿠로가 싫어. 근데 날 정말 사랑하기는 하는거야? 전에 술 마시고 같이 왔던 여자랑 바람난 건 아니고? 점점 하고 싶은 말은 미궁 속으로 빠졌다. 일그러진 제 표정을 봤을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는 그의 손길이 썩 나쁘진 않았기에 추궁하는 건 관두기로 했다.

 쿠로가 나를 사랑하는 것 만큼 나는 쿠로를 싫어해. 그리고 거기서 반으로 나눈 만큼 사랑해.

 오히려 증오가 마음의 절반을 차지하지만 사랑을 속삭이는 이유는 내가 당신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나를 사랑해서 일테다. 증오는 점차 절반으로 줄어들테고, 애정은 점차 배로 늘어날것이며, 그 때 마저도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있을는지.

 애정은 점차 식어가고 증오는 타오르다가 사그라들었다. 결국 애증조차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 다다랐다. 쿠로,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그렇다고 미워하지도 않아. 그런 나를 당신은 사랑하고, 또 미워하겠지.

 결국은 애증이다. 서로의 관심을 짓누르며, 서로를 탐하다가 헤어지는 그런. 애정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이 증오로 변질되어 머릿속에 남아있다.

 쿠로, 사랑해. 그렇지만 난 쿠로가 미워.
잇새로 흐르다 못한 말들은 혀끝에서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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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속

쿠로×

 

 당신과 항상 함께 있겠다는 약속을, 나는 어렵지 않게 내뱉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운명은 당신을 밀쳐냈다. 제게서 멀어져가고 있는 당신의 모습이 눈 앞을 가린다. 선명한 피사체가 그림을 그리듯 제 눈 앞을 뒤덮는다. 아찔한 당신의 미소가 어른거린다. 나는, 당신을 차마 제 눈에서 지울 수 없다. 다시금 당신을 사랑한다고, 다시 한 번 입밖으로 되내어 본다.

 당신은 언제나 활기찬 사람이었다. 아니, 오히려 당당하고 능글맞은 사람이라 해야하나. 항상 나를 격려해주고, 걱정해주는 -엄마같은- 남자였다. 그런 당신의 손을 붙잡으며 나는 속삭였다. 쿠로. 당신은 귓가를 간지럽히던 제 입이 멀어지자 가볍게 어깨를 떨었다. 그러곤 당신은 제게 이제껏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달콤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당신의 미소는 무언가 탁하고, 어두웠으나 확신에 차 있는 얼굴이었다. 나는 당신의 미소를 어색하게나마 따라할 수 밖에 없다. 혀 끝에서 당신의 이름이 맴돌다 부서진다.

 "쿠로."
 "잠깐 갔다오는거야. 멀리 가는 것도 아니고, 잠시 오사카 지점에 일이 생겨서 갔다 오는 거니까, 몇 일만 혼자-."
 "혼자있기 싫어. 나도 가면 안 돼?"
 "일이니까, 조금 힘들지 않을까."
 "쿠로."

 이거야 원, 선택지가 하나 밖에 없잖아. 당신은 한숨을 내쉬면서도 은근 기쁜 듯 나를 끌어 안았다. 당신의 포근한 품안에 안기니, 어느새 노곤해졌다. 제 몸을 끌어 안고선 나를 차량 뒷좌석에 태우고는 바로 오사카로 출발했다. 거침없이 나아가는 그의 질주에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그것보다 잠이 더 밀려오고 있었다. 당신은 그런 나를 잠시 바라보고선, 조금 자두라는 말과 함께 제 눈은 감기었다.

 "쿠로."
 "다 왔어."
 "쿠로."
 "좀 더 잘래?"
 "쿠로. 이게 뭐하는-,"
 "쉿. 이제 인형은 말 하면 안 되는거야. 켄마."

 당신에게 사랑한다 울부짖었을 뿐인데, 나는 왜. 

 당신의 손이 우악스럽게 제 손목을 잡았다. 당신의 혀가 제 입 안으로 밀고 들어온다. 필사적으로 거부하자 당신은 제 머리채를 잡아 채고선, 고개를 뒤로 젖혔다. 밀려드는 토기에 숨이 넘어갈 듯 들이쉬는 제 호흡을 당신의 입이 가로막았다. 점차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당신의 손가락이 제 입 안으로 파고들었다. 몽롱하게 풀린 눈이 당신을 향하고 있다. 당신은 개의치 않은 듯 제 머리를 쓰다듬고선 다시 부드럽게 입을 맞춰왔다.

 "쿠로, 일은."
 "가는 도중에 연락이 왔어. 안 와도 된다고. 그래도 이왕 떠난 김에, 오사카까지 가기로 했지. 방도 잡아놨는데."
 "그래서 여긴,"
 "호텔."
 "응."
 "하지만, 도망치려는 건 포기하는게 좋을 거야."

 뭐, 그 꼴로는 도망치기도 힘들겠지만. 매듭을 지어 제 몸을 포박시켜 놓고, 당신은 태연하게 제 입술을 삼킨다. 당신의 이질적인 태도가 제 마음을 바스라뜨린다.

 난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했을 뿐인데.

 "쿠로, 도망 안 가니까, 이거 풀어줘."
 "안 돼. 너, 도망 안 간다고 해놓고 도망간게 몇 번인데."
 "이거 아파. 풀어줘."
 "나참."

 그러면서 또 당신은 부드럽게 제 손목에 묶인 밧줄을 풀어냈다. 당신은 가끔 알다가도 모르겠다. 냉철하게 쏘아 붙이다가, 마음이 한 없이 약해져 유해지기도 하고, 부드러운 당신의 면을 보다가도, 밀어붙이는 당신의 단호함을 보기도 한다. 그 와중에 나는, 당신이 나를 아프게 하는게 가장 싫었다.

 "너, 집에 있었으면, 도망 갔겠지?"
 "따라왔잖아. 그걸로 도망 갈 의도가 없었다는게 증명이 되잖아?"
 "집엔 감시 카메라가 있는 걸 너도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그런거지? 차라리 완전히 모르는 곳에서, 도망치자고."
 "......"

 사랑해. 당신이 제 귀에 대고 속삭였다. 흩어지던 당신의 그 낮은 목소리가 제 귓가를 간지럽히다 흩어졌다. 당신의 손이 다시금 우악스럽게 제 몸을 안는다. 투박한 손이 제 머리를 쓰다듬고, 당신의 그 부드러운 입이 다시 제 입을 덮친다. 당신의 혀가 얽혀들어, 묘한 느낌이었다.

 "쿠로."
 "켄마, 사랑해."
 "......"
 "그러니까, 내 곁에만 있어. 내 이름만 부르고, 나한테만 안기고. 나한테만 사랑한다고 해."
 "사랑...해."
 "나도."

 당신의 사랑은 보답받지 못한다. 나는 다신 당신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 할테다. 당신에게만 사랑을 고하겠다고, 거짓된 사랑을 다시 속삭인다.
 사랑해, 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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