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애인이었어.
명명한 밤, 비가 축축하게 분위기를 감싸던, 그러나 마음만은 편안한 밤이었다. 괜히 밝았다는 이야기를 꺼내는 게 아니다. 우리는 격한 관계를 나누었고, 종장에는 제가 기절하듯 잠이 들었지만 제가 어지러운 잠에서 깨어났을 때(새벽 3시 쯤이었다),남자는 침대에 걸터 앉아 침대 옆 낮은 서랍장 위에 있던 액자를 보고 있었다.
액자 옆에 있던 스탠드를 켜고, 그 빛이 새어나온 곳에 있던 여자의 모습은 흔히들 말하는 미인에 가까웠다. 한동안 만난 건 어둡고 칙칙한 아저씨들 밖에 없었지만, 분명 남자는 저 여자와 행복한 생활을 했으리라 짐작, 아니 확신했다.
"좋아하는 사람이었어. 지금도 여전히 그렇고."
"헤어…지셨어요?"
"아니, 죽었어."
"…."
내가 못된 짓을 좀 많이 했거든. 남자는 조심스레 읊조렸다. 마음에 구름이 낀 듯한 느낌이었다. 남자는 소리없이 울었다. 나는 그를 뒤에서 껴안아 줄 수 밖에 없었다.
남자는 여자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 놓기 시작했다. 한 귀로 들으면서도 다른 쪽으로는 말을 흘렸다. 주변을 둘러보자 그 여자의 흔적만이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녀의 사진이 한 쪽 벽을 전부 차지하고 있었고, 남자는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볼 때마다 행복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여자의 기억이 남아있는 방에 있어서는 안 될 이물질이 된 것 같았다.
"그 사람은, 다자이 상을 좋아했…,"
"아니, 날 싫어했지."
싫다고 몸부림치는 여자를 범했어. 애인이라고 했지? 애인, 뭐 애인이라면 애인이었지, 몸만. 암튼 그녀에게 끔찍한 짓만 저질렀지. 그녀는 내 애를 가졌고, 마지막까지 나를 증오하면서, 자살했어.
"……."
"너랑 그 여자랑 닮았어."
남자의 손이 제 몸에 다시 닿았다. 더러운 손이다. 남자의 손이 검게 물들고 있었다. 그 검은 손으로 제 몸마저 물들이고 있었다. 검게, 더 더럽게!
"그래서 데려온 겁니까? 단지 그 여자랑 닮아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차마 남자의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다시 예의 그 날처럼 옷도 제대로 걸치지 못하고 그의 집을 뛰쳐나갔다. 살갗에 닿는 바람이 따가웠다. 눈물이 막 흘러댔다. 그의 집 앞에 주저앉아서 한동안 울었다.
내가 속죄해야 할 나의 업일지도 모르지.
남자는 낮게 읊조렸다. 그래, 당신이 속죄해야 할, 그 업. 하지만 부디 나를 다시금 당신의 업에 끌어들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당신의 기분에 움직이는 노리개가 아니니까.
"…거기서 울고 있을 바에야 그냥 관심을 가져달라고 달라붙는게 더 빨랐을텐데."
"그 여자는…,"
"죽었다니까, 뭘 그리 걱정해."
"그치만 아직도 사랑한다고 하셨…."
"그럼 내가 널 왜 집에 데리고 왔겠어?"
다자이 상 …! 나는 그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남자는 제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여자는 이미 제 머릿속에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냥 절 사랑하시면 돼요.
밑질 거 없잖아요.
분명 제가 더 사랑하는데.
하지만 조금은 불안한 감정이 남아있는 아쿠타가와였다.
천유, 그 두번째 흔적(1)_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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